윤혜정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2023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아니시 카푸어의 전시는 블랙홀 다음으로 새카만 블랙 컬러를 볼 수 있다는 기사와 함께 많은 관객이 몰렸다. 막상 전시장을 갔을 때 눈길을 끈 것은 높이 4m에 육박하는 거대한 검은색 덩어리들이 벽에 걸려 있는 모습이었다. 압도적인 그 작품들을 보면서 이건 무슨 뜻으로 만든 작품일까? 라는 질문이 들었다.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를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큰 네점의 조각은 일과 시간에는 사대문 안의 도로를 이용할 수 없어 꼭두새벽에 이동해야 했단다. 그렇게 수고스럽게 옮겨온 작품, 그리고 그 작품으로 작가가 새롭게 짠 공간을 놓고 저자는 전시가 어떤 풍부한 감각을 전하는지 자세히 전달한다. 일상적인 감각과는 다른 낯설고 인상적인 감각이야말로 예술 체험에서 중요하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2024년 구겐하임미술관을 오랜만에 찾은 제니 홀저의 전시 소개를 읽다 보면 전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관객이 경사로를 따라 오르는 도전적인 건축 구조를 그대로 살려, ‘미래는 어리석다’, ‘당신은 지구에 갇혀 폭발할 것이다’ 같은 경구들이 비스듬히 기운 경사로의 LED 조명을 통해 쏟아진다. 그러면서도 관객의 동선에 휴식을 부여하여 문장들을 곱씹을 여유를 제공한다. 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으로 유명한 ‘예술 섬’ 나오시마의 고택에서 펼쳐진 양혜규와 위라세타쿤의 2인전 또한 생생하게 그려진다. 두 작가는 단정한 느낌의 섬에 지진과 화산을 일으키는 자연의 폭발적 에너지를 담았다. 수많은 구슬을 이어 흘러내리는 느낌을 주는 양혜규의 조각 <소리나는 분출 뒤집기–두툼>(2024)에 위라세타쿤이 쏘아 보내는 오묘한 빛과 그림자가 합쳐져, 여전히 활동이 활발한 환태평양조산대 ‘불의 고리’를 환기 한다.
이런 근사하고 압도적인 전시를 받치는 기둥은 오랜 시간 무력감과 불확실성을 이겨가며 작품을 붙잡는 예술가의 삶과, 이들의 작품을 전시장으로 부지런히 이끄는 여러 관계자의 삶 같다. 1935년생 김윤신 작가는 버티는 예술가 인생의 모범이다. 아르헨티나의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로 작업하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떠나, 나무며 돌이며 생명력 넘치는 재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작업을 했다. 흔들림 없이 이어진 예술가의 인생 또한 하나의 작품처럼 다가온다.
“되든 안되든 내 작업을 한다는 고집(혹은 소명의식)은 어쩌면 무력감과 한몸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미술 작품은 작가들이 본질적인 무력감을 매번 잊고 또 지우는 과정이자 태도 그 자체이며, 우리는 이를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공감함으로써 일상을 잠식하는 무력감을 스스로 치유한다.” /4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