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본 지음 문학동네 펴냄
<슬램덩크>의 2025년 버전 재녹음이 결정되었고 당신도 성우 오디션에 참여한다고 가정하자. 오디션에 합격하면 누구를 맡고 싶어? 당신의 답은? <차라리 잠든 밤>의 재하의 답은 이렇다. 서태웅. 아, 서태웅 좋지. 아마도 재하의 목소리가 엄청난 미남자인가보다. 누가 뭐래도 <슬램덩크> 최고의 미남은 서태웅이 아니던가. 재하가 서태웅을 선택한 이유는 다소 황당하다. “대사가 적어서.” 선배가 다시 고르라고 하자 재하는 이 사람을 고른다. “그럼 권준호.” 권준호? 바로 그 ‘안경 선배’다. “재하는 권준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 있어서 좋다고 했다. 농구 천재나 지난한 과거를 가진 양아치 슈터가 아니라, 벤치 위에서 스타팅 멤버에 뽑히지 못한 3학년 벤치 선수. 부주장이라는 애매한 감투도 재하에게 이입할 여지를 주었다.” 그런 애매한 인물들에게 애정을 느끼고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김본 소설집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의 인물들이다. 김본은 작가의 말에서 소설집에 실린 소설이 모두 다르게 읽혔으면 좋겠다기도 하고, 하나의 이야기로 읽혔으면 한다고도 했는데 그의 말대로 7편의 소설은 주인공도 배경도 다 다르면서도 어쩐지 뭉근하게 그리운 정서를 공유한다. <슬픔은 자라지 않는다>의 선주는 누구든 뒤돌아보게 할 만큼 예쁜 친구 주연, 말끝마다 날카롭게 자기주장만 하는 강화와는 달리 지극히 평범하고 흐릿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선주가 대학생 시절 미팅에서 잠깐 보았던 친구 ‘폭탄’의 딸을 십수년이 지나서 만난다.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친구와의 기억은 인생에서 잊고 살면 그만이지만 김본 소설에서 과거는 현재와 사이 좋게 병존한다. 시간은 순행하지만 소설 속 화자들은 유년의 기억을 현재진행형으로 기록한다. 오래된 라디오의 잡음 섞인 방송,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와 같은 옛날 뉴스의 방송 사고 영상, 중고 만화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토록 좋아하던 만화책처럼. 그것은 내가 잊거나 말거나 언제나 거기 존재하고 있다. “96년생은 완전 잃어버린 세대야”라는 소리의 선언에 자신의 생년을 넣으면 소설은 나의 이야기가 된다. 잊은 줄 알았는데 나의 컵에 잔류하던 한 챕터가 재생된다. 이 소설은 참으로 이상하다. 나 자신은 더욱 아니고, 아는 사람도 아닌데 왜 내 이야기처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지.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다. 김본의 소설집에는.
나는 있기. 그날을 떠올리면 그 집이 내 집 같아. 진경이의 외투나 구겨지고 해진 오 달러로 산 시나몬, 맨다리를 녹일 수 있는 집 말이야. 단순히 영어를 잘하거나 강단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 애가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거든.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