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파리에서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1980년대의 홍세화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꼬레에서 왔소.” 꼬레에서 왔지만, 그가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 역시 꼬레가 된 현실. 해외 지사 근무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이 터져 귀국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그는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시작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1995년 출간되었고, 당시 아직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던 홍세화 없이 출간 기념회를 치른 후 금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출간 30주년 기념, 홍세화 선생의 타계 1주기를 기억하는 의미로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이전까지는 한없이 낯설었을 ‘톨레랑스’(tolerance)라는 단어를 한국 사회에 알린 것이 이 책이었고, 유럽 여행이 드물었던 시대에 그의 택시 뒷좌석에 타고 파리 시내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듯한 진기한 경험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이제 파리 여행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고, 그게 어렵다면 유튜브로도 생생한 여행기를 볼 수 있지만, 지금 하필 왜 이 책일까. 개정증보판에는 저자가 2023년 <한겨레>에 기고한 마지막 칼럼이 수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망명 생활 후 2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홍세화를 반긴 것은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판이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귀결이 전 국민에게 카드 회사가 외치는 “부자 되세요”라니. 좌절감을 느낀 그는 당시를 소회하며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소와 좌절이 아니라고 전한다. 이 칼럼의 제목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계급과 세대 격차가 심화되고, 타자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분열의 시대인 2025년이야말로 톨레랑스를 배워야 할 때다. 책에서 홍세화는 몇번의 눈물을 토로한다. 마지막 눈물은 파리의 어느 새벽, 택시가 노트르담 다리를 건너 시테섬을 빠져나와 생미셸 광장을 달릴 때 흐른다. 텅 빈 광장에서 택시가 가자는 대로 달리던 홍세화는 걷잡을 수 없이 흐느낀다.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만나서’ 서글프게 울었던 이민 초기와 달리 그는 환희에 차서 운다. 옆자리에 동승한 우리는 무섭도록 빛나는 파리의 야경을 흘겨보며 운전사의 흐느낌을 엿듣는다. 머리말에서 “빠리에 오세요. (중략) 내 얘기를 들으시겠어요? 곧 당신에게 달려갈게요”라고 농치던 한 남자의 인생이 여기에.
우리는 현장에 들어가더라도 되돌아올 수 있는 길이 항상 열려 있지만 일반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아. 그들에겐 노동 현장이 바로 생존이지만 우리들에겐 그게 생존이 아니라 의식일 뿐이거든. 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