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1992년 신년 세일!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배달된 편지봉투 속에는 채시라가 모델인 그 옛날의 전단지가 고이 들어 있다. 엄마는 인쇄물을 보자마자 이건 아빠가 보내온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기민하게 미래를 내다본 투자를 하고 부자가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우리의 주인공 ‘에스’의 아버지는 종이 인쇄가 사양산업의 길목으로 들어서기 직전 인쇄소를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일거리가 뚝 끊겨 파산한다. 그쯤에서 멈췄으면 좋았으련만 아빠는 성공의 기억이 있는 을지로 인쇄골목을 떠나지 못하고 엄마의 인감도장으로 빚을 내 연거푸 파산한 후 잠적한다. 아니, 여기서 멈췄으면 또 나았을 것이다. 에스의 엄마는 이번엔 에스의 이름으로 빚을 내 홍제동에 작은 옷가게를 열고 카드 네개로 생활비를 돌려막으면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부모의 빚을 자식이 이어받아 개인회생과 파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무살의 이야기. 암담하기만 할 것 같지만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은 탱탱볼처럼 힘 있게 통통 튀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굴러간다. 대학 진학은커녕 10대 때부터 알바 인생을 전전하지만 에스는 근무를 시작할 때 고용계약서부터 쓰고, 불합리한 상황에는 직원들을 대표해 사장에게 따질 줄도 아는 다부지고 굳센 사람이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는 돌보려 하는 주인공 에스가 자신을 연민하기보다는 상황을 늘 유머러스하게 바라보는 덕분에 소설은 경쾌하게 유지된다. 빚만 잔뜩 남기고 잠적한 아빠가 보낸 전단지를 본 엄마가 “채시라만 보내왔다니?”라고 묻는 장면, 누구도 부자가 될 수 없는 세계에서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를 보고 “이쯤이면 프로가 됐을 거니 이제 부자되라고 재촉하는 거냐”는 한숨 섞인 자조 역시 이 소설의 톤을 드러낸다. 에스와 엄마가 일하는 홍제동 거리, 한국에 파견왔다가 아프리카 박물관장에게 착취당하는 레무의 일터, 지금은 ‘힙지로’로 불리는 을지로 인쇄거리의 풍경 등 소설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듯 낯선 공간들이 등장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아프리카의 레무도, 부모에게 명의를 주고 빚만 진 20대 에스도 약자이고 피해자이지만 이들은 서로 손깍지를 끼고 불공정한 세상에 균열을 낸다.
휴대폰 매장과 아파트 분양 사무실은 매일 아침 개인 실적을 발표하고 구호를 외치게 했고, 베이비 스튜디오는 월급을 정한 날짜에 주지 않고 번번이 어기면서 촬영과 메이크업 어시스턴트 역할도 하라고 했다. 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