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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시 보다 2024>
이다혜 2024-10-22

박지일, 송희지, 신이인, 양안다, 여세실, 임유영, 조시현, 차현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시를 쓰고 읽는 것에 있어 살필 것들이 있다. 시를 쓰고 읽는 얘기에 관해 쓰는 사람과 그것을 읽겠단 사람. 그들이 각각 취할 수 있는 태도. 시가 자리할 수 있는 지면이나 스마트폰, 태블릿, 누군가의 머릿속, 누구들의 입술 사이… 그런 매개체 중 하나를 고른다면. 나의 눈과 손은 어떤 위치에 어떤 자세로. 어떻게 있을까. 물음이 끊이질 않는다.” <시 보다 2024>에 실린 차현준의 시작 노트 도입부다. <시 보다 2024>에 대한 출판사의 책 소개에는 “한국 현대 시의 흐름을 전하는 특별 기획”이라고 되어 있는데, 오늘의 한국 시를 만날 수 있는 시 앤솔러지 기획이다.

“여기서부터 당신이 살던 행정구역이 낯설어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또박또박 읽어보다가// 뒤를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표지판이 눈앞에서 멀어질 때// 두툼한 보조 배터리를 한 손으로 말아 쥔다// 질렸던 겁이 방전되는 동안// 충전되는 모험// 시야 안에서 발 빠른 가로수들// 옆 볼로 유리창을 짓누르는 동안// 눈 뜬 채로 얼마간 풍경을 무시한다// 모르는 나를 태운 버스도 잘 가는 거 같고// 처음 보는 나를 맞닥뜨린 터널도 꾸역꾸역 받아들이기는 하고// 터널을 빠져나와도 살던 곳이 보이기는 한다// 오후와 함께 방전될 것이다.” 차현준의 <얼마간 흘려보내보기>를 읽으며 문득 길 위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순간으로 향한다. 여기에는 모험도 있고 방전도 있고 그 끝에 귀가가 기다릴 것이다. 임유영의 산문시들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시의 화자는 71년에 한번 지구를 지나는 폰스-브룩스 혜성을 볼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이어리에 적어둔다. 하지만 정작 그날이 되자 술을 많이 마시고 잠들어버린다. 그저 그런 밤이 되어버린다. “(전략) 그러나 나는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평범한 숙취의 고통을 느끼며 태양 아래 깨어난다. 휴대폰을 켜서 지난밤 지구를 지나간 혜성을 가장 멋진 모습으로 촬영한 사진을 찾아본다. 생각보다 그렇게 굉장하진 않군. 하지만 내가 별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면 멋진 밤을 보냈을 만도 한 모습이군. 이 밤은 보름이 아니었고, 날씨도 청명했고, 미세 먼지가 심하지도 않았군. 정말 다행이군. (후략).” (<예언>)

<시 보다 2024>에는 박지일, 송희지, 신이인, 양안다, 여세실, 임유영, 조시현, 차현준의 시와 시작 노트, 평론가와 동료 시인들의 추천의 말이 함께 실렸다. 양안다의 <델피니움 꽃말>의 도입부에서 노래하듯 “세계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사람들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그 이상한 일들을 놓치지 않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시를 짓고, 제목을 붙이고, 우리 앞에 가져왔다. 이것을 찬찬히 읽는 것으로 올가을은 충만할 것이다.

글자들끼리는 사이가 좋았다

손을 잡고 몸을 맞추며 말했다

이곳은 무해합니다

테러와 전쟁과 천재지변이

없습니다

나의 말이 아니라

글자가 자기들 멋대로 사랑해서

만든 말이었다

신이인, <실낙원>, 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