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 신용목, 조해진, 반수연, 안보윤, 강태식, 이승은 지음 문학동네 펴냄
“종소는 후배의 출판사에 가서 일을 도왔다.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말을 후배가 어렵게 꺼낸 지난달까지는.” 겸임교수로 8년을 일했지만 임용에 실패한 뒤 대학교와 연결된 리듬이 불규칙해지며 경제적 사정도 예외 없이 나빠진 종소는 어머니와 살고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노인 우울증에 걸렸는데, 알고 지내는 후배의 말을 들은 그는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은은한 불안에 휩싸인다. 카페를 운영하는 영주는 아들이 학교에서 ‘압사 놀이’를 주도해 체구가 작은 학생을 기절시킨 사건과 관련해 학교를 방문하는 일을 남편과 논의한다. 아들 상현의 말에 따르면 “영상에서 본 참사 사건을 흉내내보고 싶었고 겨우 그 정도로 사람이 쓰러질 줄은 몰랐다”고. 영주는 카페에 자주 오는 손님을 본 남편이 하얗게 질리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손님이 바로 종소이고, 영주의 남편은 종소의 임용을 방해한 교수였다. 조경란의 <그들>의 줄거리다.
200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출간됐다. 대상을 받은 조경란의 <그들>을 포함해 신용목의 <양치기들의 협동조합>, 조해진의 <내일의 송이에게>, 반수연의 <조각들>, 안보윤의 <그날의 정모> 등이 수록됐고, 작가노트와 리뷰가 함께 실렸다. 소설과 작가노트, 리뷰를 읽으면서 소설에 접근하는 여러 통로를 발견하는 느낌으로 읽어가게 된다. 조경란은 <그들>의 작가노트에서 종소에 대해 “그가 누군가를 만나서 미워하는 마음도 원망하는 마음도 사라지게 되는 희미한 경이의 순간을” 갖게 하는 일을 말한다. 그런 순간을 발견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상심을 동반한다. 안보윤의 <그날의 정모>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동생 정모가 보호 병동에 입원할 때 “왜 나를 버렸어요? 내가 미쳐서 나를 버렸어요?”라고 울부짖는 장면 뒤로 “우리는 울지 않는다. 기를 쓰고 울지 않는다”라고 적은 뒤, 작가는 한 박자 쉬고 “그럼에도 당연히 우리에겐 즐거운 날들이 있다”라고 썼다. 이 문장 뒤로는 즐겁지 않은 날들, 울음을 참는 날들이 방 안의 코끼리처럼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이다. 남동생을 지키는 누나, 누나를 지키는 남동생. 권여선은 이 소설에 대해 “마침내 지옥을 향해 함께 손잡고 가는 남매의 행복한 악몽의 기록”이라고 해설했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의 진실한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때로는 꿈같은 순간들이지만 그 꿈이 길몽인지 악몽인지를 구분할 방법은 없다, 아니, 사실은 악몽이고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이대로 살아가는 방법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세상이 날 갖고 실험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슬플 수 있는지. 지금도 날 찍어서 저기 어디서 특수한 영상으로 다 보고 있다고. 가지고 놀면서 비웃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