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지음 창비 펴냄
할 말이 없다는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없다는 뜻은 아닌데, 할 수 있는 말을 고르는 게 적잖이 괴로워서다. 이 괴로움은 나의 몸 안에서부터 솟아오르기도 하고 바깥을 향하는 시선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침묵 속에서 잠잠히 마음을 놓고 있는 편이 좋게 느껴지는 상태다. 그러다 보면 어라, ‘이 상태를 좀 좋아하는지도?’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기도 한다. 내 안에 고여 있는 언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썩 괜찮은 기분을, 박연준의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을 읽으며 느꼈다. 시인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인 박연준의 새 에세이다.
“골동품과 유실물은 같은 공간에 담긴다. 서로를 노려본다. 낡아가는 일과 잊히는 일 중에 무엇이 더 나쁜가 생각한다.”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에서 눈길이 가는 단어들은 모두 시간과 관련이 있다. 맨 처음에 등장하는 시간은 새벽이다.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4등분되어 존재했던 하루에 새벽이 더해졌다는 이야기다. “전에는 새벽을 몰랐다. 혈기 넘치던 시절, 밤과 낮의 구분을 우습게 여기던 그때는 새벽을 휘저으며 함부로 깨어 있었다.” “지난 계절의 옷은 계절이 끝날 때마다 죽는다”라는 문장도 소리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상기시킨다. 지나가는 삶.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낯설게 알게 되는 책이기도 하다. 한문으로 소통하지 않는 일상이 어색하지 않은 오늘날, ‘적산가옥’이라는 단어는 그저 관광지의 표지판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박연준은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고 깜짝 놀란다. 한자로 ‘敵産’이라고 쓰는 이 단어는 “자기 나라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 소유의 집”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한자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고 나면 생각이 많아진다는 깨달음이 이어 붙는다. “‘적’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투박함, 무거움, 피와 눈물, 세월, 역사, 증오, 원망, 무너지지 않는 벽 따위를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가옥의 입장에서 보면) 적의 나라에 ‘남아 있는’ 집의 시간을 떠올린다. “어떤 시간은 흐르지 못하고 남아 ‘응고된 시간’을 만든다.” 인생의 어느 때가 되면 어떤 사람들은 더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관찰 역시 시간에 대한 통찰이다. ‘시간의 책’처럼도 느껴지는 이 에세이의 제목은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이고, 생각해보면 마음을 먹는다는 일부터가 쌓인 시간의 인과를 은은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책을 가지고 다니기만 해도 뇌에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일종의 ‘뇌를 위한 괄사 요법’으로서의 책 소유가 효용이 있다면 이 책은 어쩐지 고양이와 함께 두발 뻗고 자는 편안한 잠을 선사할 것 같다.
몸을 가진 나는, 몸을 가졌기에 두렵다. /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