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대한 글을 기대하고 <아구아 비바>를 펼쳤다면 이 책은 절반은 당신을 만족시킬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다. <아구아 비바>는 이해가 안되는 문단의 반복이다. 대여섯줄을 잘라내 SNS에 올린다면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 아포리즘이 되겠지만 이어지는 문단과 문단은 서로 연결성을 갖지 않고 있어 여러 페이지를 그저 흘려보내야 한다. ‘당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에게 계속 화두를 던지고 있지만 화자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전개해 나가고 그 안에는 내러티브가 없다. 읽다 보면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라는 생각도 든다. 난해하고 현학적으로도 느껴진다. 이 산문 안에서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당신에게 글을 써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당신이 내 그림에서 명확성 대신에 두서없는 말들을 수확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쓰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건 어떤 단일한 클라이맥스일까? 내 삶은 단일한 클라이맥스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두서없이 쓰여진 문장과 문장들은 그저 현재를 말하고 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오직 글만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지만, 그렇게 아무리 글을 써도 상대가 온전히 이 글을, 그리고 그것을 쓰고 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나는 지금, 바로 이 중요한 순간에 당신에게 글을 쓴다. 나는 오직 지금 속에서만 이야기를 펼친다. 나는 오늘 말한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이렇게 실재하고 또 기필코 사라져버릴 순간에…나는 가까스로 살아 있다.”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쓰여진 글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저 각각의 문장을 피상적으로만 읽어야 한다. 기이한 구조 속에서 써내려간 언어를 여러 번 다시 읽어가며 나는, 혹은 당신은 화자를 이해해보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목적과 메시지, 정답을 정해놓고 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들어라: 나는 너를 있게 한다, 그러니 나를 있게 하라”. <아구아 비바>는 ‘살아 있는 물’이라는 뜻이다. 살아 있는 물은 계속 흐른다. 계속 흐른다. 흐르는 것에는 형태가 없으며, 우리는 그것을 절대 잡을 수 없다.
13쪽
나는 내 모든 걸 바쳐 당신에게 글을 쓰고 있으며, 나는 존재의 맛을 느끼고, ‘당신의 맛’은 순간처럼 추상적이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도 온몸을 바쳐 형태가 없는 것을 캔버스에 옮긴다. 나는 온몸으로 자신과 씨름한다. 당신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들을 뿐. 그러니 당신의 온몸으로 나를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