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은 결말이 정해져 있다. 특히 4·3 사건처럼 수많은 주민이 죽어간 참사라면, 책에서 아무리 밝고 희망찬 내용이 펼쳐진다 해도 결말에 대한 근심과 불안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육지에서 제주로 건너온 거대한 뱀의 신화에서 시작하는 제주 이야기는, 식민지 시대 제주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히고 수탈한 일제와 그에 맞서 싸우고 끌려가고 죽어간 청년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는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미군이 공습을 가하는 바람에 섬은 암흑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이 어두운 시절에도 두 소년 창세와 행필은 바닷가에서 일본군을 향해 방귀 뀌는 시늉을 하며 웃음을 터트린다. 드세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힘들게 말 다루는 법을 배우는 창세의 누나 만옥 등 여성들 또한 제 삶을 개척해나간다. 청년들의 생기, 미래를 향한 꿈은 시대가 아무리 엄혹해도 절대 부서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슬프다. 꿈과 희망이 어떤 식으로 굴절될지 알기 때문이다. 해방 후 강렬한 집단적 열망이 섬 전체에 번져나간다. 제주만의 자치적 공간을 꿈꾸는 청년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같은 단어들이 밤의 토론 자리를 수놓는다.
“종기처럼 곪아 있는 치욕과 증오, 그것이 터져나와야 해방이었다.” 그렇지만 미군정 또한 일제처럼 폭압적이고 비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청년들은 실망한다. 남북이 갈라지고 서북청년단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또다시 폭력이 일상을 파고든다. 격화된 시위에 경찰들은 총을 쏘고, 중산간 지대에 숨어든 무장대원들과 전투를 벌인다. 결국 학살이 벌어지고 수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는다. 절망의 시대가 희망과 해방의 시대로 변했다가, 다시 폭력과 어두움의 시대로 급변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상처를 입지 않을 사람 누가 있을까. 4·3 사건의 피해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중편 <순이 삼촌>이 제주에서 서울에 올라온 순이 삼촌이 기이한 모습을 보인 이유를 찬찬히 설명하는 형식을 취한 것처럼, <제주도우다> 또한 “허깨비”처럼 살아온 창세가 후손들에게 힘겹게 끔찍한 과거를 알리는 액자소설 형식이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적 비극이기 때문이리라.
71쪽, 3권
“희망이 살해당했다는 크나큰 좌절감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몰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