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멜라 지음 / 창비 펴냄
김멜라 작가의 첫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의 아세로라는 도끼를 들고 그야말로 설친다. 요가 매트 위에서도 도끼를 휘두르는 연습을 하고, 창밖에서 욕지거리로 이웃이 싸우는 소리가 들릴 때에도 도끼를 손에 쥔다. 누구를 해칠 용도는 아니다. 사람에게 눈, 코, 입, 손이 있듯이 도끼가 원래 아세로라에게 쥐어진 존재와 같다. 소설은 두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다. 앞장에서 아세로라에 의해 동거인으로만 소개되는 인물이 아세로라의 할머니 사귀자씨다. 2장이 할머니 하이쎈스의 이야기다. 아세로라와 하이쎈스는 남산빌리지라는 낡은 상가 건물의 없는 층에 산다. 할머니와 아세로라가 사는 2층에는 주소가 없다. 왜 주소가 없냐고 묻자 할머니는 답한다. “처음부터 그랬어. 주소는 못 만들었어.”
어느 날 아세로라는 우연히 할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다. ‘신문보도안, 남산 아래 간첩 조직 일망타진. 하숙을 경영하며 소시지 반찬으로 하숙생을 포섭, 암호명 하이쎈스라고 불리던 사씨….’ 할머니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해서 아세로라가 달라지진 않는다. 중학교 행정실에서 일하던 부모가 학교 공금을 횡령해 아세로라를 두고 도주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간첩 누명을 쓰고 주소 불명의 상가 2층에 숨어 살게 된 ‘하이쎈스’ 사귀자와 동생이 죽고 부모와도 헤어져 할머니에게 보내진 손녀 아세로라. 연령이 다른 두 여성이 힘을 합쳐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워 이기는… 그런 승리는 이 소설에 없다. 아세로라와 하이쎈스, 주변에 폭풍이 몰아쳐도 두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주어진 자기 삶을 살아낼 뿐이다. 거기에는 슬픔이나 분노, 안타까움이나 당황과 같은 감정의 기복도 없다. 남산빌리지를 둘러싼 이웃들은 사회에서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십상인 인물들이다. 김멜라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단어나 편견에 의문을 제기하고 상상력을 더하는 소설을 쓴다. <없는 층의 하이쎈스>는 남루한 남산빌리지와 간첩과 같은 소재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실은 다른 의문을 제기하는 소설이다. 이 사람들이 왜 주인공이 되면 안되느냐고. 주소 불명에 이름도 명확지 않은 인물들이 손을 잡고 자기 인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91쪽누군가를 계속 공격하기에 아세로라는 무르고 약했다. 그래서 욕이 나왔다. 더 깊이 자신을 찌르려고. 왜 그래야 하는지, 어째서 멈출 수 없는지 아세로라도 몰랐다. 모르는 것과 불확실한 것 사이에서 얼굴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짓눌리며 이렇게 곁에 있는 사람을 물어뜯겠지. 남김없이 쥐어짜겠지. 끝도 없이 자기 탓을 하면서. 약한 사람은 그러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