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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이다혜 2023-04-18

파스칼 키냐르 지음 /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다가오는 죽음은 식욕과 미의 감정을 낳는다. 언어를 넘어서는 사색이 있다. 자연이 침묵 가운데 무르익음의 절정에, 부패의 절정에 내주는 사색이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말한다. 아름다움은 때아닌 것과 때맞는 것을 나눈다. 노인의 얼굴에, 너무 익어서 터져버린 무화과에, 빵의 균열에, 멧돼지며 사자 같은 맹수의 크게 벌린 아가리에 나타나는 죽음은 때맞다. 유혹적이다. 로고스 없는 이 아름다움은 계절의 한 속성이다.”

‘사색적 수사학’이라는 원제를 가진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은 파스칼 키냐르의 문학론이다. 음악가와 언어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5개 국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악기를 익히면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 두 차례 심한 자폐증을 앓은 이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작가는 1976년부터 갈리마르 출판사와 연을 맺어 원고 심사위원, 편집 교정자, 출판 실무 책임자 등으로 일했다. 1991년에 발표해 후일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 <은밀한 생> <음악 혐오> <떠도는 그림자들> 등을 쓴 그의 문학론은 아주 오래전으로 시계를 돌린다. 철학자의 글쓰기와 작가의 글쓰기로 나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현자들이 남긴 글들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주력하는 이 책은, 철학자의 글쓰기에 경도된 서구 문명이 놓치고 있는 감수성의 세계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논리와 논증에 기반한 철학적인 글쓰기를 반박하며, 그가 지향해야 한다고 믿는 방향은 어떤 쪽일까. 이미지에 기반한 문학적 글쓰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문장 하나하나가 엮어낸 단순한 이미지의 그물들. “숲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시냇물이 바다를 찾듯이 불꽃은 높이 치솟으며 태양을 찾는다. 바다는 시냇물 떼다. 인간이 떼를 지은 것이 도시이듯이 태양은 불꽃의 떼다.” 텍스트의 즐거움이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남으려면 욕망이 어디에서 올지 독자가 알 수 없어야 한다. “이미지들을 제시하는 언어가 발기한 가운데 흥분을 유발하고 활기를 띠고 커져서 배가되는 환각적인 이미지들의 몽환적이고 확실한 진전이 없다면 소설은 없다.”

19쪽

“작가란 제 언어를 선택하고, 그 언어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다. 그는 어린아이와 정반대다. 자신을 지배하는 것에 구걸하지 않고, 그것에서 해방되려고 힘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