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는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 후 사라진다.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에게 몇십만원부터, 백만원, 2백만원씩 빌려 잠적한 민재는 전 여자 친구 미선에게만 가끔 안부를 남긴다. 돌려받으면 좋겠지만, 못 받는다고 하여 당장 생활이 어려워질 정도는 아닌 애매한 금액들. 이것은 특별한 사건일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일까.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에는 심판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 아닌지 싶은 생각도 든다. 흔히 볼 수 있지만 특별하기도 한 민재는 <소설 보다: 여름 2022>에 수록된 소설 <포기>에 나오는 인물이다. 민재는 소설 속에서 정식으로 등장하지 않고 주인공 미선과 호두의 대화를 통해 그려진다. 미선의 전 남자 친구인 민재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호두는 또 어떤가. 큰아버지가 죽은 엄마의 보험금을 채가서는 주식 투자로 반절이나 날려버리고 돌려주지 않는다. 이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사연이지만 내가 당했다고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대사건이다.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의 고모는 집안의 막내딸로 결혼을 하지 않고 부모를 모시고 산다. 잉여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돌봄 노동에 차출되지만, 그는 가족 내 사고뭉치로 인식된다. 육아를 등한시한 부모를 대신해 목경과 무경 자매와 놀아주곤 했던 고모는 어느 날 아이들을 데리고 사냥에 나선다. 고모가 사냥이 가능한 산에 아이들을 데려갔다가 한밤중 낯선 남자들을 만나는 장면이 주는 스펙터클은 독자의 멱살을 잡아끈다. 문학과지성사가 계절마다 ‘계절 소설’을 엮어 출간하는 <소설 보다>는 그 분기에 가장 기다려지는 단행본 시리즈다. 3편의 단편소설과 작가 인터뷰가 작고 얇은 문고본 사이즈에 실려 있다. 문학상 수상작 소설집보다 이 계절 소설집을 기다리는 이유를 가늠해보니, 젊은 작가들의 생동하는 야심을 발견할 수 있어서다. 이미상 작가는 왜 무경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을까. 김지연 작가는 왜 민재의 결말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의문을 해소해주는 작가 대담까지 읽고 나면 완벽한 포만감으로 배를 두드리게 될 것이다.
함윤이, <강가/Ganga>, 127쪽
잊으면 안돼. 너는 내몰린 게 아니야. 너는 선택한 거야. 우리 대신에, 너 홀로 여기에서 살아가는 일을 택했어. 아냐. 부정하지 마. 화내지도 마. 비난하는 게 아니야. 네 선택을 이해해. 나중에 모른 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우리가 모두 각각의 선택을 내렸다는 것. 자신의 의지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