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하루 속에 미래를 계획하는 일상다운 일상, 그런 일상 속으로 원인불명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다들 별일 아니라고 여기고 전염병이 돈다는 응급실 의사의 신고를 무시했으나, 곧 사망자가 폭증하고 바이러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하여 유럽으로, 미국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간다. 사람들은 출근을 피하고 집에 숨어 지내거나 인구밀도가 낮은 동네로 피난을 떠난다. 가족을 잃은 이들은 철저하게 격리를 하지 못해 그렇게 되었다고 자책하며 슬퍼한다. 도시 기능은 마비되고 세상은 문명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역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0호 환자’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용감한 의사가 있고 또 백신 개발에 매진하는 학자들이 있다.
<엔드 오브 맨>은 세계적 유행병을 지나온 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이 압축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전염병의 발생으로 모두가 공포와 절망에 빠지나 생존자는 회복하여 힘을 내고 현실에 적응한다. 그런데 코로나19에서 아이디어를 얻긴 했어도 확실한 차이가 있으니 바이러스가 남성을 주로 공격한다는 것이다. 여성과 일부 면역력 있는 남성만이 죽지 않는다. 여러 화자가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이 소설은, 화자가 대부분 여성인 만큼 그동안 제대로 성과를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 무너진 현실을 개척하는 이야기가 중심에 놓인다. 아들과 남편을 잃었으나 인류학적 관점에서 계속 기록을 남기는 학자 캐서린, 국가가 무너지지 않도록 성실하게 일하는 보안국 공무원 던, 전염을 피해 농가로 대피 온 소년들을 정성껏 돌보는 모번. 맨 처음 전염병을 신고했다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던 의사 어맨더는 결국 노고를 인정받는다. 싱가포르에서 유아도우미로 일한 필리핀 여성 로자미가 국경이 닫히기 전에 부유한 고용주의 개인 비행기를 몰래 타고 고국으로 피하는 이야기는 전복의 짜릿함을 느끼게 해준다. 기존의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도입된 <엔드 오브 맨>의 세계를 보며, 아직 전염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금의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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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세계가 위기에 빠졌다는 이유로 패혈증, 수막염, 맹장염, 천식, 신장염 같은 위급한 질환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