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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라짜로>가 보여주는, 현재 경제구조 안에서 자발적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를 비추는 투명한 거울

성서에서 라자로는 죽음에서 살아난 자다. 예수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뒤 그의 마을을 방문한다. 이미 썩은 내가 진동하는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다. 그는 예수 이전에 부활했으며 죽음과 삶을 통해 예수의 영성을 증명해냈다. 하지만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로지 보는 자들의 몫이었다. 누군가는 믿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의심했다. 믿음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태도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라짜로 역시 성서 속의 라자로처럼 자신을 보는 이들의 욕망을 성실하게 비춘다.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의 과정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끈질긴 착취의 역사 그리고 지금 이 세계의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두의 낭만은 오해였으며…

<행복한 라짜로>의 시작은 낭만적이다. 가난하지만 대가족이 기거하는 집에 부족한 전구를 놓고 분쟁이 한창이다. 그때 창 밖으로 구애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전까지 툭탁거리던 자매들은 키득거리며 언니의 구혼자를 놀린다. 청혼을 승낙한 가족은 밤늦게 축하 음식을 나눈다. 오래전 누군가는 그렇게 살았을 듯한 모습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향수”는 대상에 대한 거리감이 전제될 때만 가능하다. 주체가 대상과 시공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을 때 대상이 느끼는 실질적인 고통에서 분리되어 그리움이라는 감정적 호사를 누릴 수 있다. <행복한 라짜로>의 초반부는 관객이 그런 거리감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담배의 여왕 루나 후작 부인이 인비올라타의 주민을 노예처럼 부리며 착취하는 과정을, 또 그 주민들이 부모 없는 라짜로를 재착취하는 과정을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게 본다. 이미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알폰시나의 아들 탄크레디의 납치 자작극은 마치 오 헨리의 단편 <붉은 추장의 몸값>에 나오는 소동처럼 웃으며 지켜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우발적 납치극이 불러온 경찰의 등장은 안전했던 거리를 급격하게 줌인해버린다. 인비올라타의 조작된 시공간 관념은 향수의 대상이 아니라 폭력의 증거일 뿐이었다. 후작 부인은 대홍수 이래로 고립된 마을 주민들을 속이고 사회로부터 격리한 채 강제 노역과 빈곤 속에 허덕이게 했던 것이다. 서두의 낭만적 감상은 완벽한 오해였다.

오해를 걷어내고 보니 전구 몇개로 어둠을 이겨내던 대가족의 실체는 세계로부터 고립돼 물리적/인지적 암흑 상태에 갇힌 노동자들이었다. 결혼하면서 마을을 떠나겠다는 젊은 연인들을 가로막은 것은 두려움이나 고지식한 가족의 반대가 아니라 마름 니콜라의 교묘한 협박이었다. 그들은 늘 굶주렸고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쉬지 않고 일했지만 마름이자 중개상인 니콜라에게 몇 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나면 늘 빚만 남았다. 그 빚은 그들을 강제 노역에 다시 얽어매는 족쇄가 되었다.

인비올라타의 삶이 현재의 우리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 폭력성은 시큰하게 가슴을 후벼판다. 그들이 당한 노동과 착취에서 우리의 것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가슴 아픈 사실은 향수를 걷어내고 보니 그들과 우리가 크게 다를 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선형적 시간을 분해함으로써 낭만적 감상을 단숨에 뼈아픈 현실 인식으로 전환시킨다.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하는 환상적인 기법을 통해 과거에서 비롯된 구조적 병폐들이 여전히 지속되는 현재의 비극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카메라의 위치를 찾아낸다.

인비올라타의 주민들이 모두 구출된 뒤 열병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절벽으로 떨어진 라짜로는 아주 오랫동안 인비올라타의 황량한 계곡에 방치된다. 예수의 방문 대신 늑대의 울음소리에 일어난 라짜로는 먼 길을 걸어 도시에 도착한다. 그의 여정은 시골에서 도시로의 공간적 이동이자 전 지구적인 시간적 변천이다. 과거 인비올라타의 소작농과 지주의 관계는 이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불법 이민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구도로 대체되었다. 라짜로는 그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인력시장에 도착한다. 거기서 이제는 다국적 인력의 노동 브로커가 되어 더 값싼 노동력에 자신을 팔도록 이민자들을 부추기고 있는, 인비올라타의 마름 니콜라를 만난다. 시간과 자리는 변했지만 그의 역할은 동일하다.

감금 상태에서 풀려나 도시로 들어간 인비올라타의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현대판 노비에서 도시 빈민으로 위치만 바꾸었다. 사기와 절도가 그들의 새로운 생계수단이 되었다. 공권력은 그들을 자유 상태로 풀어주었지만 그들이 잃어버린 시간과 기회들을 보상해주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런 교육도, 생산 자본도 없이 도시에 던져졌다. 라짜로는 탄크레디와도 재회한다. 친구이자 형제를 자처했던 그는 전 재산을 탕진했고 허풍만 여전했다. ‘은행’이라는 거대 자본이 모두를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부자와 빈자를 이분법적 선악 구도 안에 놓아두지 않는다. 이미 현대사회에서 부는 자본가라는 개인의 얼굴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행’처럼 얼굴 없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선함과 악함은 더이상 개인의 도덕적 선택이 아닌 계급과 권력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이 작품은 라짜로가 현대사회의 ‘성자’일 수 있다는 암시를 주지만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당도한 존재로 그리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나 세계 혹은 자아를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후작 부인에게 라짜로는 자신의 착취를 합리화할 변명에 불과했다. 소작인들이 라짜로를 착취하고 있다며 그들은 자신이 양심에 가책을 가져야 할 선한 부류가 아니라고 말한다. 탄크레디는 라짜로에게 친구가 되자며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협박범의 편지를 조작하며 자기 손가락을 베기 두려워 라짜로의 손을 베어 혈서를 쓴다. 가진 돈을 다 잃고 백발이 된 탄크레디에게 여전한 것은 이기적인 태도뿐이었다. 자본가에게 기생해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니콜라는 라짜로를 모른 척한다.

계시를 읽지 못하게 된 인간들

라짜로를 성스럽게 받아들이는 유일한 인물은 인비올라타에서 후작 부인 댁의 하녀였던 안토니아뿐이다. 안토니아는 라짜로의 귀환이 기적임을 알아차리는 유일한 인물이다. 생계를 위해 사기를 칠 때도 라짜로의 존재는 그녀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인비올라타 빈민 공동체는 생존 문제가 너무 중요해 라짜로에게 “유령일지라도 먹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고 호통을 친다. 모두들 라짜로를 통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기 욕망을 투영해 이야기한다.

성당의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들어온 라짜로 일행을 수녀는 밖으로 쫓아낸다. 이곳은 당신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고 한다. 찬양은 교회를 떠나 라짜로를 따라온다. 교회가 특별한 계층에만 선택적으로 영적 치유를 제공하는 서비스 기관으로 전락했음을 비꼬는 대목이다. 라짜로는 은행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피 흘리는 라짜로의 시신은 지금의 경제구조 안에서 자발적인 노예가 된 인간들이 신이 보낸 어떤 계시도 읽지 못하는 구원의 문맹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이 살려낸 라짜로를, 인간이 다시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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