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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가 상투적인 사랑을 그리는 방법

말도, 사랑도, 삶도 무의미하지 않기에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남자와 상처받은 여자가 만나 서로를 보듬는다는 내용은 클리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리셰와 클리셰 아닌 것의 구별은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비일상과 일상의 경계는 모호하고, 만남과 사랑 같은 것들이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클리셰를 통해 사건으로서의 사랑이라는 클리셰에 저항하고 있다. 미카(이시바시 시즈카)의 말처럼 사람들은 연애를 배운 적이 없음에도 연애를 한다. 혹은 흉내낸다.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연애를 모방하고 감독은 그런 현실의 연애를 영화로 재현하고, 사람들은 또다시 그 재현을 재현한다. 클리셰의 거대한 순환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랑은 이미 오래전에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도시를 사랑하는 일

이 클리셰의 순환 속에서 사랑한다는 말조차 상투어로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안녕이라는 말의 의미를 묻지 않듯이,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 또한 물어서는 안 된다. 의미를 묻는 것은 의미의 부재와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지(이케마쓰 소스케)와 미카가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안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카는 예전 남자친구에게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다. 전 남자친구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카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전 남자친구가 사랑한다고 말하더라도 미카에게는 침묵과 다를 바 없다. 말로 깨트릴 수 없는 침묵이며, 미카가 아무리 말한다고 하더라도 깨어질 수 없는 침묵이다.

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다. 두 의미는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아끼다’는 말은 대상의 현존을 전제로 하지만 ‘그리워하다’는 말은 대상의 부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은 사전적 의미로 규정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욕으로 간다는 동창에게 건넨 “힘내”라는 신지의 무심한 말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미카가 죽음을 말하며 웃는 것 또한 우습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쓰인 색도 마찬가지다. 파랑, 빨강은 일의적으로 해석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시이 유야 감독은 <행복한 사전>(2013)에서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을 통해 언어와 소통의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사전 편찬의 총책임자 마쓰모토(가토 고)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뜻이며, 그건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이며, 자신의 마음을 적확히 표현해줄 말을 찾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고독한 존재이기에 타인과 연결되는 일은 쉽지 않다는 말처럼 들린다. 또한 이성이 아니라 마음을 연결하는 일이라는 말은 시인의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들에게 사전은 시와 다를 바 없다.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고 있는 사이하테 다히의 시는 미카의 내레이션으로 등장한다. “도시를 사랑하게 된 순간 자살한거나 마찬가지야”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도시란 모두가 다른 모습으로 똑같이 살아가는 곳이며, 그렇기에 도시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클리셰를 사랑하는 일이다. 클리셰란 누구도 의미를 묻지 않지만 실은 무의미한 말들이며, 그래서 죽은 말들이다. 클리셰 속에 사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미카는 사랑을 하면 평범해진다고 말한다.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서 우리는 약속과 규정의 세계, 사전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규정은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신지와 미카는 평범해지는 걸 받아들이려 한다.

삶은 계속된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애니메이션이 등장한다. 유기된 강아지가 트럭에 실려가서 죽고, 강아지를 화장한 재가 굴뚝에서 나와 신지의 공사 현장으로 날아가는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신지는 강아지의 죽음을 보지 못하며, 미카와 데이트할 생각으로 들떠 있다. 감독 이시이 유야는 신지가 “반쪽밖에 세계를 볼 수 없는, 혹은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남자”라며, 이것은 도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처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신지의 삶은 생존을 위한 노동과 휴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와 동료들은 도쿄올림픽 이후 공사 일마저 끊길 것을 걱정한다. 신지의 최대 문제는 자신의 생존이기에, 신지가 세계의 은폐된 것들을 모두 알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인 문제다. 강아지의 죽음, 신지의 옆집 노인의 죽음, 그리고 도모유키(마쓰다 류헤이)의 죽음까지 모두 미카의 표현에 따르면 무시되는 죽음이며, 가치를 매기는 권력의 무시와 은폐가 존재한다. 그리고 은폐되어 보이지 않는 것들은 불안을 유발한다. 그래서 신지는 끝없이 불길한 예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예감에는 실체가 없기에 친구 도모유키의 죽음 이후에도 불길한 예감은 끝나지 않는다.

신지와 미카는 도쿄의 밤에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각자의 불행을 마주 보고 있기에 타인의 불행을 보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검정이 아니라 가장 짙은 블루 속에 있다. 신지와 미카가 시골에 갔을 때, 밤은 더이상 짙은 블루가 아니라 검정이 된다. 신지와 미카가 그 검정의 하늘에서 서로를 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그들은 더이상 자신의 내면만을 보지 않는다. 그곳에서 신지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자신이 미카의 불행 또한 보이지 않게 만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신지는 보지 못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보지 못하기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지 못함’의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어려운 이유는 이처럼 양면성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규정과 언어에도 양면성이 있다. 규정되지 않는 존재는 자신의 유일성을 보존하며,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타인과 연결되지 못한다. 반대로 규정의 세계로 들어가면 타인과 연결될 수 있지만 자신을 잃게 된다. 이 영화는 이해받지 못할 말들로 이루어진 삶과 상투어로 이루어진 삶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정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모든 무의미들 속에서 의미를 규정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혹은 무의미들을 그저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답하지 않는다. 영화는 신지가 보는 세계가 그러하듯이 존재를 보여줄 뿐 의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러나 이 침묵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있다. 도모유키는 신지의 말이 무의미하다고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의 의미가 아니라 말의 존재다. 신지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말을 하느냐를 통해 관객은 신지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시이 유야에게 삶 또한 그런 것 같다. 클리셰로 이루어진 삶이든, 이해받지 못할 말들로 이루어진 삶이든, 가장 중요한 건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젊은 거장 이시이 유야는 시대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삶에 대한 긍정을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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