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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 시리즈 안에서 <범블비>의 성취
장영엽 2019-01-10

드라마가 있는 로봇

지난 2015년, 마이클 베이가 ‘워 룸’이라는 별명을 가진 라이팅룸을 운영한다는 풍문이 할리우드에 떠돌았다. 유능한 시나리오작가들을 고용해 한자리에 모아놓고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건 피치 못한 선택인 듯 보였다. 2014년 개봉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4편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에 쏟아진 혹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지난 2007년 첫 <트랜스포머> 영화가 로봇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의 신기원을 열어젖힌 이래 이 프랜차이즈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명분 없는 액션 장면과 개성이 부족한 로봇 캐릭터, 지나치게 헐거운 플롯은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의 단점으로 누누이 지적돼왔지만 4편에 이르도록 해법을 찾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으니 그간 꾹 참고 영화를 본 관객의 인내심이 바닥날 법도 했다. 마이클 베이로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였다. 아니면 시리즈에 사망 선고를 내리는 결단을 내리거나.

어쨌거나 마이클 베이의 노력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감독을 맡지 않은 첫 <트랜스포머> 영화이자 시리즈의 프리퀄 혹은 스핀오프작에 해당하는 <범블비>는 <트랜스포머> 시리즈 사상 가장 완성도 높은 영화라는 평을 유수의 매체로부터 받고 있다. 마이클 베이가 조직한 2015년의 라이팅룸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아시안계 혼혈 영국인 여성 작가 크리스티나 호드슨이 시나리오를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7년을 배경으로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인기 캐릭터 범블비와 소녀의 우정을 조명한 이 영화는 같은 대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얼마나 다른 결과물이 탄생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적절한 사례라 할 만하다.

<범블비>는 달랐다

<범블비>는 다양한 측면에서 이전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거리를 두는 작품이다.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차이는 영화의 스케일이다. 1987년이라는 특정한 시간대, 캘리포니아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범블비>는 태초부터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북극에서 우주까지 영화의 스케일을 종으로 횡으로 넓혔던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와 다른 길을 간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선택은 탁월했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그를 따르는 오토봇들이 본격적으로 지구인들과 관계를 맺기 전인 1980년대로 돌아감으로써 <범블비>는 전편과의 연결고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봇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는 점도 <트랜스포머> 시리즈와의 차이다. 거대 로봇들이 현란하게 싸우는 마이클 베이식 액션은 놀랍게도 사이버트론 행성에서 맞붙는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전투를 다룬 짧은 오프닝 신에서 마무리된다. <범블비>를 연출한 트래비스 나이트(애니메이션 <쿠보와 전설의 악기>(2016) 연출) 감독은 로봇 수를 줄이는 대신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여 소수 정예의 주요 로봇 캐릭터를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이 영화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로봇이라고는 주인공 범블비와 두명의 디셉티콘 로봇, 셰터와 드롭킥 정도인데(<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인기 캐릭터 옵티머스 프라임조차 카메오로 등장한다), 이들은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에 전례 없던 긴 호흡의 드라마와 변신 과정을 할애받았다. 특히 항공기의 모습으로 지구에 날아와 착륙한 뒤 오프로드 자동차로 변신하고, 순식간에 다시 전투형 로봇 디셉티콘으로 변하는 셰터와 드롭킥의 ‘트리플 체인지’ 장면은 <범블비>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변신 메커니즘으로 꽤 근사하게 연출되었다. 이처럼 스펙터클의 포화를 지양하는 대신 캐릭터의 개성을 쌓는 데 주목하는 트래비스 나이트의 선택은 <범블비>의 주요 인물에 관객이 매력을 느끼고 그들의 드라마에 집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범블비>의 가장 큰 성취는 유수의 관객과 평론가들이 지적해왔던 마이클 베이식 ‘메일 게이즈’(male gaze·남성의 시선)를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의 계보에서 삭제했다는 데 있다. <트랜스포머> 1, 2, 3편의 주인공 샘 윗위키와 4, 5편의 주인공 케이드 예거를 거쳐 탄생한 <범블비>의 찰리(헤일리 스테인펠드)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욕망이 반영된 시선에서 자유로우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마음껏 하는 소녀다. 이 영화가 그를 묘사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트랜스포머> 1편이 주인공 소년 샘을 그리는 방식과 대비된다. 샘에게 첫차란 곧 성적 자유를 의미했다. 그는 안전벨트가 하나밖에 없다는 이유로 또래 소녀를 무릎 위에 태우고 기뻐하는 철부지 소년이었다. 그런 샘의 시선을 반영하듯 초기 세편의 <트랜스포머> 영화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자동차 보닛을 손보는 메건 폭스와 남자들의 오랜 로망인 박시한 셔츠에 속옷만 입고 샘을 기쁘게 하는 로지 헌팅턴 휘틀리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전시함으로써 주요 여성 캐릭터의 역할을 남성의 시선 속에 가두고 격하시켰다.

찰리는 다르다. 그는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소녀다. 영화 <범블비>는 본격적으로 로봇을 등장시키기 전, 음악을 사랑하고 자동차 부품을 다루는 데 큰 재능이 있으며 말수가 적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툰 18살 사춘기 소녀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인다. 찰리에게 첫 차란 카센터에서의 성실한 노동의 산물이자 이제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추억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더불어 차는 아버지를 잊고 새롭게 출발한 어머니와 달리 새 가족 안에서 자꾸만 겉도는 찰리의 유일한 벗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러한 찰리의 상황이 로봇과 인간 사이의 드라마를 만든다.

영화가 찰리의 첫차, 범블비를 다루는 방식도 흥미롭다. <범블비>의 범블비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자기 자신보다 <E.T.>(1982)와 <아이언 자이언트>(1999)의 외계 생명체를 닮은 캐릭터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인간과 로봇이 감정적인 유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이 훨씬 더 자주 주어지는 작품이다.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에서 언제나 로봇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였다. 그런 인간을 수호하고 지키는 건 전적으로 옵티머스 프라임이 이끄는 오토봇들의 고고한 대의에 의한 것이었다. <범블비>는 이 영화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유일한 오토봇, 범블비의 목소리와 기억 유지 장치를 삭제함으로써 인간이 로봇의 삶에 개입할 공간을 만든다. 범블비에게 찰리는 단순히 지켜야 할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잃어버린 목소리를 대신할 대변인이자 지구에 정착하도록 돕는 조력자다.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간과했던 인간과 로봇 사이의 균형을, <범블비>는 아름답고 유려하게 성취해냈다. 그런 순간이 궁금하다면 영화 후반부에 펼쳐지는 범블비와 디셉티콘의 전투 신을 보면 된다. 범블비가 같은 종족인 디셉티콘에 맞서 싸우는 동안, 찰리는 그저 숨죽이고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고만 있을 인물이 아니다. 매 장면에서 소녀와 로봇은 함께 곤경을 겪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함께 성장한다. 이것이야말로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영화가 결코 넘보지 못할 <범블비>만의 성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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