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잠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버려야 할 것과 가져가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숨도 쉬지 않고 안내 멘트가 쏟아졌다. 보험 판촉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일하는 중이라고 둘러대거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종료 버튼을 누르곤 했다. 그런데 왠지 이번에는 정당하게 거절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아 바쁘게 쏟아지는 안내원의 멘트를 비집고 말했다. “안 되겠네요. 제가 외국으로 아예 나가게 됐어요.” 순간 영영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통신판매원의 말이 딱 멈췄다. 잠시 뒤 그녀는 말했다. “고객님 정말 잘되셨네요. 좋으시겠어요.” 이상한 반응이었다. “제가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시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어디든 여기보다 좋지 않겠어요.” 이상했지만 낯설지 않은 반응이었다. 외국에 나가는 것이 결정된 이후 나를 둘러싼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오! 루시>의 세츠코(데라지마 시노부)에게서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그 여자들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떠남에 대해 보수적이었다. 가면 고생만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여기서 누리는 것들을 못 누릴 것이라고 걱정해주었다. 여성들이 떠남에 대해 더 큰 환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지금, 여기서 누리고 있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적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츠코가 존(조시 하트넷)을 통해 루시로 태어나는 순간은 이런 환상과 현실의 교차점 위에 있다. 떠나면 어디든 여기보다 낫지 않겠느냐는 현실의 피로감과 아주 소박한 기대감.
내가 아닌 나를 발견해준 사람
조카인 미카(구쓰나 시오리)가 수강료를 환불받지 못해 세츠코에게 인수인계한 영어학원의 풍경은 낯설고 기괴하다. 영어학원이라기보다 노래방 같은 실내 인테리어에 야쿠자 같은 원장이 있고, 유흥업소 종사자 같은 접수원이 있다. 그런 세팅이 존의 막무가내식 영어 교습법을 얼떨결에 받아들이게 만든다. 미로 같은 학원 복도와 조악한 조명으로 침침한 교실에서 세츠코를 맞이한 존은 다짜고짜 “포옹이 필요하군요”라며 그녀를 품에 안는다. ‘미국’과 ‘영어’라는 기호들이 느닷없이 허락해준 스킨십에 세츠코는 이상한 위안을 받는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세츠코의 삶은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에서 달리는 전차에 몸을 날려 자살한 청년은 뛰어들기 직전 세츠코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잘살아.” 세츠코는 이 사건을 겪고도 멍한 표정으로 잠시 담배를 피웠을 뿐 아무렇지 않게 출근했다. 그녀의 삶은 청년의 죽음에도 어떤 균열이 생긴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녀의 세계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깨진 건 오히려 존이 미국식 인사랍시고 따듯하게 그녀를 ‘허그’했을 때였다.
죽음이 균열을 낼 수 없는 삶. 세츠코의 삶에는 어떤 욕망조차도 부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낡은 아파트는 그녀의 앙상한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발 디딜 틈 없이 걸려 있는 옷가지들과 쓰레기인지 가재도구인지 분간 안 가는 물건들로 가득 차 정작 그녀의 생활이 존재할 틈이 없다. 언니 아야코(미나미 가호)에게 애인을 빼앗긴 지 수십년이 흘렀지만 그녀의 삶에는 어떤 관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그녀는 타인과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왔다. 회사에서도 가족에게서도. 언니와 조카는 서로에게 모녀간의 정이 없는 듯 굴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이 되면 세츠코에게 등을 돌리고 모녀간의 연대에서 그녀를 배제해버린다.
‘존’은 세츠코를 중년의, 지친, 일본의, 직장 여성 세츠코가 아닌 매력적이고, 여유로운, 블론디 미국 여성 루시로 바꾸어 호명해주었다. 이 호명은 따뜻한 허그와 함께 세츠코의 취약지점을 정확하게 파고들고 그녀는 본래보다 강해진다. 존이 계속 그 학원에 남아 있었더라면 타인과 여유롭게 대화하고 아무렇지 않게 허그할 수 있는 따뜻한 삶의 온기에 대한 갈망은 그 음침한 영어학원 안에서 대충 수습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존이 미카와 함께 그곳을 떠난 이후 세츠코가 간신히 견뎌오던 현실 세계는 엄청난 결핍이 되어 다가온다. 모든 이에게 과도한 친절로 오지랖을 떨던 요시코의 퇴직 기념 회식에서 세츠코는 결국 자기혐오를 요시코에게 투사해 퍼붓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더이상 원래의 세츠코로 돌아가기는 힘들어졌다는 것을. 세츠코는 자신을 다시 ‘루시’로 만들어줄 ‘존’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세츠코의 미국 여행은 루시가 되는 환상으로의 진입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로의 이동일 뿐이었다. 정장 차림에 깔끔하게 머리를 빗어넘기고 은테 안경을 쓴 지적인 젠틀맨 존은 그곳에 없었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파자마 바람인 채 이미 두달치 월세가 밀린 존이 거기 있을 뿐이었다. 세츠코는 쉽게 실망하지 않는다. 월세야 대신 내주면 될 것이고 존에게 사랑을 고백하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이 그녀를 다시 루시로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특히 언니에게 그것은 세츠코 안의 요시코, 즉 모두에게 친절한 오지랖의 발동일 뿐이었다.
새로운 삶이 더 나은 삶일까
샌디에이고의 해안가 절벽에서 미카는 세츠코에게 물었다. “이모, 우리 멕시코처럼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새로 시작할까?” 일본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다시 멕시코로. 어디로 가야 그 새로운 삶은 시작될 수 있는 것일까? 새로운 삶이 더 나은 삶이긴 한 것일까? 갑자기 영화 안에서 수화기 저쪽의 통신판매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의 삶에서 나를 규정하는 모든 가치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더 나은 삶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지금 가진 것에 대한 미련이 없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전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세츠코’들이 ‘루시’가 되기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시가 만났던 샌디에이고의 존은 아내와 딸을 두고 학생과 사랑에 빠지고 월세도 못 내 절절매는 바람둥이일 뿐이었다. 그런 존의 현실을 보고 미카는 멕시코를 꿈꾼다. 더 낮아지지 않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을 꿈꿀 때, 그 꿈은 과연 희망일까, 절망일까?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 희망이나 절망이 일본이나 미국 같은 특정 국가의 지리적 경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타케시(야쿠쇼 고지)에 의한 구원은 다소 도식적이다. 먼 곳만 바라보던 여성이 절망의 극한에 이르렀을 때 현실의 남성이 등장해 따뜻한 손길을 내민다. 그나마 그것이 섣부른 사랑이 아니라는 점은 다소 위안이 된다. 타케시가 ‘존’을 통해 꾼 꿈은 ‘톰’이 되는 것이었다. 엄격한 태도 때문에 아들을 자살로 몬 아버지 타케시가 아니라 따듯하고 다정한 톰. 그는 아들을 살리지 못했지만 세츠코를 살렸다. 루시와 톰으로 만났던 그들의 어색한 ‘허그’(hug)가 세츠코와 타케시로 돌아와 따듯한 포옹으로 바뀌는 지점에 이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큰 위로가 있다. 우리 모두는 따뜻한 포옹이 필요하다. 프리 허그 같은 낯선 이의 맥락 없는 허그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그런 포옹. 어떤 환상적인 여행이나 지독한 모험에도 결국 버리지 못하고 끌고 다녀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