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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에서 작아진 것은 주인공의 사이즈만은 아니다

좋은 영화의 조건

리처드 링클레이터제임스 베닝에 관한 다큐멘터리 <더블 플레이>에 인상적인 대화가 등장한다. 링클레이터가 자신의 고향에 세운 시네마테크로 제임스 베닝을 초청해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무엇이 좋은 영화인가를 질문한다. 이에 제임스 베닝은 “나는 좋은 영화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사실 좋은 영화는 이미 너무 많다. 난 형식과 문법이 새로운 영화를 더 지지한다. 그런 영화들이야말로 영화 문화의 저변을 넓혀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제임스 베닝의 말에 동의한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영화적 이해이자 정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언을 조금만 뒤집어보면 곧 쉽지 않은 곤경이 찾아온다. 어떤 영화에서 새로운 형식과 문법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영화인가를 판단하는 일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또 다른 곤경의 순간. 지지하던 감독의 반갑지 않은 변화 혹은 선택을 마주할 때의 당혹스러움이다. 그동안 그가 만들어온 영화적 세계와 작가적 서명을 무색게 하는 패착 혹은 모호함에 대해 여전히 그의 영화를 과연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지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깝게도 내게 알렉산더 페인의 <다운사이징>(2017)은 그러한 곤경의 영화다.

변혁의 모색, 다운사이징

2013년에 만들어진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네브래스카>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하나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쇠한 아버지는 100만달러에 당첨되었다는 거짓 홍보물에 속아 자꾸만 집을 나선다. 당첨금을 받기 위해 홍보업체가 있는 도시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것이 거짓 전단임을 설명하지만 아버지가 납득할 리가 없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여정에 함께 동참하기로 한다. 알렉산더 페인의 고향이기도 한 네브래스카주의 황량한 겨울 풍경과 낙후된 도시의 유민처럼 살아가는 가난한 노인들 그리고 차창 밖으로 지루하게 펼쳐지는 인적 없는 대지의 고독과 쓸쓸함. 알렉산더 페인은 이 영화에서 그간 자신이 다루었던 지배적인 정서들을 압축하여 처연한 풍경의 미학을 완성해냈다. 흑백의 와이드한 화면 안에 담기는 황량한 네브래스카의 풍경은 흡사 시적인 서부극의 은유와도 같았고, 동시에 그것은 척박한 현실에서 거짓 환상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심리적 내면의 풍경이기도 했다.

알렉산더 페인의 첫 장편 데뷔작 <시티즌 루스>로부터 <네브래스카> 그리고 이번 영화 <다운사이징>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를 요약하는 키워드는 곤경과 실패, 고독과 위안, 일탈과 여행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그는 일상적 삶의 근간을 이루는 미국의 역사와 정치적 구조에 대한 논평과 성찰, 동시에 유머와 풍자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그의 영화들은 (<시티즌 루스>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불현듯 삶의 곤경에 처한 비루한 남성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여느 영화와 같은 삶의 극적 변화 혹은 성취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남성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위로에 관한 영화들이었다. 물론 이번 영화 <다운사이징>도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인구 과잉, 환경 파괴,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점을 걱정하던 노르웨이 과학자가 발명한 인류 축소 테크놀로지, ‘다운사이징’에 의해 사람들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몸을 줄여 생산과 소비 모두를 최소화함으로써 새로운 대안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혁명적 기획이었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소시민들의 기획은 달랐다. 다운사이징을 선택한 사람들이 상상한 대안 사회는 지구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는 유토피아적 히피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부를 극대화하는 탐욕과 소비주의에 대한 로망이었다. 이것은 주인공 폴(맷 데이먼)의 레져랜드 방문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랑과 평화, 우정과 연대의 공동체가 아니라 이들은 120배 이상 증가되는 부의 쾌락, 거대한 저택과 화려한 귀금속이 약속하는 사치와 향락의 유혹에 빠져든다. “작아지는 것은 부자들만 누리던 걸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일갈하는 극중 두샨(크리스토프 왈츠)의 말처럼 이들은 더 큰 것을 가지기 위해 작아지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평범한 노동계급의 삶(낡은 집, 해결 불가한 채무들, 상대적 빈곤감과 콤플렉스, 대책 없는 노후)을 살아가던 폴에게 이것은 이상적인 유토피아처럼 보였다. 누구나 삶을 리셋하고자 하는 소망을 지닌 것처럼 폴은 다운사이징을 통해 과감히 삶의 변화를 선택한다. 그러나 모든 기술 유토피아적 담론이 영화적 상상력과 조우하는 순간 ‘디스토피아적 SF’로 전화하는 것처럼 <다운사이징>에서 폴의 선택(변혁의 의지)은 자연스레 그의 곤경으로 연결된다. 단순하게는 그와 사랑을 약속하며 함께하기로 했던 아내의 배신에서 비롯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축소된 유토피아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삶의 근본적인 모순과 갈등들 때문이기도 하다. 사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고독과 실존의 문제이며, 사회적 차원에서 그것은 계급모순과 인종차별, 지배와 착취, 거대한 장벽과 빈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영화에서 폴의 패착이 비단 영화 속 캐릭터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의 감독 알렉산더 페인의 패착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크기의 축소, 모순의 확장

‘다운사이징’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는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중 가장 큰 예산이 소요됐다. 얼핏 <걸리버 여행기>의 반대 버전 혹은 마르셀 에메의 <생존시간 카드>처럼 풍자와 은유로 점철된 동화적 세계를 연상케 하지만 감독은 이 영화 <다운사이징>이 보다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히길 바란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소위 ‘작아지는 인간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주된 소구점이라 할 수 있는 ‘크기의 스펙터클’에 집착하지 않는다. 멀게는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1957)로부터 최근의 슈퍼히어로 영화 <앤트맨>(2015)까지 이러한 영화들은 작아진 인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대해진 일상의 소소한 사물들(벌레, 욕조 등)을 역경의 스펙터클로 치환하는 데 집착한다. 그러나 <다운사이징>에서 감독은 그러한 중력과 크기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회 체제의 폭력과 모순의 문제를 묘사하는 데 더욱 주력한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다운사이징, 즉 인간이 축소되는 과정이다.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집단적으로 진행되는 다운사이징 과정은 자본주의의 메뉴팩처링 생산과정으로 비유된다. 개인의 특이성과 존엄성 대신 비싼 수술비용을 지불하는 개인들은 익명의 작은 유기체로 변모하여 시술의 각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의료진들의 작업 풍경 역시 여느 공장과 흡사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무심하다.

극중 폴은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자신의 선택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만 관객은 그 수술 공정과정에서 이미 그의 삶이 기존의 자본주의적 체제가 강제하는 지배와 권력들, 사회적 관계망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것은 폴이 레져랜드의 또 다른 세계, 즉 터널을 지나 목도하게 되는 유색인종과 하층 노동계급이 거주하는 지역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이 공간에 대한 묘사와 시선은 흡사 프리츠 랑이 <메트로폴리스>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세계를 단순한 이분법적 공간으로 분할하며 비판받았던 묵시록적 비전과 유사하다.

<다운사이징>은 분명 알렉산더 페인이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SF영화이자 현실·정치·경제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끌어들여 풍자한 대담론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전의 작품들이 성취했던 개인의 고독과 삶, 세계와의 관계가 이 영화에서는 훨씬 빈곤해진다는 점이다. 극중 폴은 감독의 여타 페르소나들처럼 삶의 곤경 속에서 여전히 고독해지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상상적 풍요로 구성된 그곳의 시각적 풍경들 속에는 이전 작들을 지탱했던 삶의 진짜 무게와 정서가 스며들지 않는다. <어바웃 슈미트>에서 쓸쓸이 자신의 삶의 궤적을 찾아나가던 노인의 회한도, <디센던트>에서 그 아름다운 낙원, 하와이조차도 삶의 무게에 짓눌린 남자의 분노와 곤경으로 치환해냈던 서정적 쓸쓸함도, 그리고 아무것도 없음을 상징하는 이미지 그 자체, <네브래스카>를 품어내던 연민의 미장센도 이 영화에선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인 양 파란 알약과 함께 비로소 폴에게 보이게 된 풍요(두샨의 호화로운 삶)와 빈곤(청소 노동자들의 삶)의 극단적인 이분법, 그리고 노르웨이 발명가를 만나기 위한 긴 여정과 사랑, 자신의 발명이 실패로 점철됐음을 자책하며 느닷없이 제기하는 종말론과 이에 연루되어 또다시 갈등하고 선택해야 하는 폴의 여정 속에는 영화가 설정한 추상적 전제(자본주의 모순, 테크놀로지 모순, 인류멸망 등)만 존재할 뿐 진짜 삶, 노동하는 삶의 흔적은 기이하게 사라졌다. 마치 그의 첫 번째 레져랜드 저택을 장식했던 가짜 명화들처럼 <다운사이징>에는 진짜 삶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다. 알렉산더 페인은 극중 폴처럼 잘못된 방법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이전작들이 아주 구체적인 개인의 내면을 통해 미국적 삶이라는 큰 세계를 함축했다면, 이 영화는 거대한 세계라는 추상으로부터 한 개인의 구체적인 삶으로 들어가려는 정반대의 방법론을 취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모든 구체적인 영화적 정서와 삶의 편린들조차 작아져버렸다.

알렉산더 페인 혹은 폴 샤프라넥의 여행

알렉산더 페인이 종종 오마주를 바쳤던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1942년작 <설리번의 여행>에 흥미로운 설정이 등장한다. 할리우드의 성공한 영화감독 설리번은 문득 자신의 영화가 쾌락적 오락영화일 뿐 잔혹한 현실의 질서와 삶을 반영하지 못했음을 비관한다. 실업과 빈곤에 처한 이들의 진짜 삶을 체험하기 위해 그는 무일푼 부랑아로 변장한 후 거리의 삶을 체험한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영화 지망생 여성을 만나 진솔한 사랑과 삶을 깨우쳤다고 느낀 그는 다시금 대저택의 화려한 삶으로 복귀한 뒤,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수천달러를 5달러짜리 지폐로 교환한 후 거리의 부랑아들에게 직접 나눠준다. 그러나 5달러에 만족하지 못한 한 부랑자가 설리번을 공격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자본주의의 모순이 부자들의 ‘자선’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까?

알렉산더 페인은 일련의 작품들에서 개인의 삶을 위로해주는 대안으로 종종 사소한 선의가 이끌어내는 커다란 위안을 묘사하곤 했다. <어바웃 슈미트>에서 자신의 삶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임에 절망했던 노인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 그가 후원했던 아프리카의 가난한 소년으로부터 날아온 감사편지에 눈물을 흘린다. <디센던트>에서 하와이의 드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주인공은 그 땅을 개발론자들에게 매각하기를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 하와이의 자산으로 남기는 것을 선택한다. 이 영화 <다운사이징>에서 감독은 주인공 폴의 삶의 변화를 통해 그를 둘러싼 세계의 변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고민과 실천을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영화의 문제적 인물, 베트남 출신의 여성 녹 란 트란(홍차우)이 등장한다.

서구 비평에서 이 캐릭터는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그녀의 과장된 영어 발음과 빈민가의 풍경이 인종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혐의였다. 이러한 비판은 분명 타당한 점이 있다. 사려 깊고 선하며, 여러 감정의 결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 백인 남성 주인공 폴에 비해 녹 란 트란은 제3세계 여성 이미지로 타자화되고 희화화된다. 그녀가 비록 선한 의지로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부자들의 남은 음식과 약을 빈자들에게 나눠주는 행위) 그녀는 분명 독선적이며 단순하고 감정의 소통이 불가한 인물로서 남게 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순간, 폭우 속에서 가난한 노인에게 음식을 나르던 폴은 불현듯 빈민가의 풍경과 무력한 사람들, 그리고 연신 밖에서 녹 란 트란이 그를 독촉하며 울려대는 자동차 클랙슨 소음 속에서 멈춰 서게 된다. 노르웨이의 히피 공동체와 함께 하고자 했던 결심을 포기하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그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일까? 음식을 나르는 행위는 정말로 이들 공동체를 위한 행동일까? 알렉산더 페인의 <다운사이징>은 이전까지 작은 화해와 위안을 결론으로 제시했던 전작들과 달리 다시금 불안과 곤경의 상황으로 주인공을 되돌려놓는다. 주인공 폴의 불안만큼이나 이 영화 역시 감독의 작품세계를 지배했던 정서와 생기, 대안 사회에 대한 정치적 고민 등 모든 것을 모호함 속으로 되돌려 놓는다. 알렉산더 페인은 이 작품에서 폴의 궤적만큼이나 돌이킬 수 없는 패착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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