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는 전자를 관찰하는 현미경을 생각했다. 아주 작은 전자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파동이 짧은 빛이 필요한데, 파동이 짧은 빛은 에너지가 커서 이 빛(광자)이 전자와 충돌하면 전자는 임의의 방향으로 튕겨나간다. 즉 전자를 정확히 관찰하려 하면 전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만약 전자를 변화시키지 않기 위해 파장이 긴 빛을 쏘게 되면 우리는 정확한 전자의 위치를 관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변화된 전자 혹은 희미한 전자를 관찰할 수밖에 없다. 정확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다.
이 불확정성 원리는 코언 형제의 주요 테마 중 하나다. 코언 형제는 그의 영화 중 <시리어스맨>(2009)과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2002)에서 불확정성 원리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특히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불확정성 원리는 변호사가 주인공 에드(빌리 밥 손튼)의 무죄를 설파하기 위한 장광설의 주요 논거가 된다. 또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의 살인마 쉬거(하비에르 바르뎀)도 불확정성 원리에 기반을 둔 인물이다. 쉬거는 타인의 삶과 죽음을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는데, 이것은 단지 놀이가 아니라 누가 죽어야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쉬거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 신의 죽음 이후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세 번째’ 살인의 의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세 번째 살인>(2017)도 불확정성의 원리를 말하는 작품이다.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애초에 진실은 알 수 없으니 희미한 실재의 이미지 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사실들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러나 피고인 미스미(야쿠쇼 고지)를 만나면 만날수록 미스미의 진실에 집착하게 되고, 그에 따라 미스미는 자신의 진술을 바꾸기 시작한다. 관찰자가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결국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진실에 당도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시게모리가 미스미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스미와 사키에(히로세 스즈), 시게모리가 눈밭에서 함께 노는 장면, 사키에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플래시백이 아니다. 회상도, 사실도 아니지만 시게모리에게는 실재적이다. 이로 인해 관객은 오프닝에서 보았던 미스미의 살인도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된다. 이 점에서 접견실 유리로 변호사인 시게모리의 얼굴과 살인자인 미스미의 얼굴이 중첩되는 신은 중요하다. 접견실의 유리는 두 인물의 얼굴을 모두 반사시킬 수 있는데, 그래서 관객은 중첩된 두개의 얼굴에서 무엇이 직접 보고 있는 상이고 무엇이 유리에 반사된 상인지를 구분하기가 힘들어진다. 구분이 힘들어지면서 관객은 자신이 어느 쪽에 위치해 있는지도 헷갈리게 된다. 다시 말해 변호사쪽에서 살인자의 얼굴을 직접 보고 있고, 반사된 변호사의 얼굴이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살인자쪽에서 변호사의 얼굴을 직접 보고 있는지를 알기가 어려워진다. 누구도 실상과 허상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못한 것이다. 대화보다 체온으로 상대를 이해한다는 미스미의 말도 이런 이성적 판단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가족과 죽음, 삶이라는 소재를 지속적으로 다뤄왔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오즈 야스지로와 비교되어온 이유는 단지 이런 소재의 측면만은 아닐 것이다. 소재보다는 두 감독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유사점이 더 중요해 보인다. 오즈 야스지로는 정적인 이미지 속에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인물들에 대해 그려왔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물들도 이와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무력하기에 단념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고, 달리 말하면 순응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무력하지 않은 인간은 없기에 이 순응하는 인물들에게서 불쾌하지만 거대한 섭리가 발견된다. 그것은 죽음과 이별은 피할 수 없기에 누구나 언젠가는 고아로서 세상을 견뎌야 한다(<아무도 모른다>(2004))는 진실이며, 생성과 소멸은 순환하며 반복된다(<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는 섭리이다. 누구나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가 문제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진리를 끝없이 변화하는 유한자가 받아들이는 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순응이다. 이 거대한 섭리의 엄습이 그의 영화들을 숭고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그러나 <세 번째 살인>에서의 인물들은 순응하지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지도 않는다. 진실에 대해 콧방귀를 뀌는 초반부 시게모리의 태도는 유한자로서의 겸허함이라기보다는 현대인이 모두 체화하고 있지만 발설하지는 않는 실용주의 인식론을 대변하고 있다. 시게모리뿐만이 아니다. 판사였던 시게모리의 아버지는 미스미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았음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고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았음을 후회하는 것이다. 미스미는 이런 시게모리의 아버지를 따라서 자신이 삶과 죽음의 결정권자가 되고자 하는 인물이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제목인 ‘세 번째 살인’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될 뿐이지만, 미스미의 두 번째 살인이 ‘죽어 마땅한 자’에 대한 징벌이고 이것이 살인이라면 국가가 ‘죽어 마땅한 자’들에게 행하는 사형은 왜 살인이 아닌가. ‘죽어 마땅한 자’를 판단할 위치에 있는 자는 누구이며, 그런 위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세 번째 살인’이라는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의문처럼 보인다. 이것은 오판 가능성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의 질문이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드러나는 거대한 긍정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즉 사형제도와 사법제도 일반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삶과 죽음의 관계를 탐색한다. 징벌로서의 죽음은 보상으로서의 삶이라는 개념을 전제한다. 그래서 삶은 아직 사형당하지 않았음과 동의어가 된다. 삶이란 오직 생존으로 축소되고, 죽음은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그러나 삶은 종착점으로서의 죽음을 포함하고 있기에 죽음에 대한 혐오는 결국 삶에 대한 혐오가 된다. 말하자면 삶이란 가장 혐오스러운 종착점을 향해 달려나가는 고통스러운 달리기에 불과할 뿐이다. 미스미가 체포당하기 전 자신이 키우던 새를 죽인 것도 이런 혐오에 기인한 것이다. 결국 죽을 거라면 바깥에서 고통스럽게 살다 죽기보다는 지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스미는 실은 삶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 감독의 전작에서의 인물들은 죽음에 순응함으로써 삶을 긍정한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까지 받아들이는, 삶에 대한 거대한 긍정을 만들어내는 인간들이며,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한계까지 긍정하는 유한자들이다. 이 점에서 <세 번째 살인> 이전까지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물들은 일종의 정면교사였다. 그러나 <세 번째 살인>의 인물들은 자신의 유한함을 부정하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결국 다다르고자 하는 지점은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즉 <세 번째 살인>에서의 인물들은 반면교사로서, 이 부정적인 인물들의 좌절을 통해, 부정의 부정을 통해 어떤 거대한 긍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변증법의 서곡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