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다루는 영화는 자칫 주제 면에서 진부해지기 쉽지만, 그렇다고 그 스펙트럼이 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 퍼펙트 데이>(2016)는 그런 면에서 꽤나 독특한 면모를 지닌 영화다.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시점을 배경으로, 평화협정이 체결되던 어느 24시간 동안에 한 인도주의 단체에서 일어난 사건을 영화는 좇는다. 실제로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은 1995년 당시에 발칸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의 사정을 베타캠으로 직접 촬영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원작은 ‘국경없는 의사회’ 출신의 작가 파울라 파리아스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감독은 전쟁 중에 관찰했던 기억을 다수 떠올리며 이를 영화화했다. 처음에 나는 이 작품이 20세기 후반의 가장 커다란 비극 중 하나를 지나치게 가볍게 바라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부분들을 회피하고 넘어가는 데다, 결말 부분의 실마리가 지나치게 단순했기 때문이다. 비견컨대 로버트 알트먼의 <야전병원 매쉬>(1970)보다 덜 시니컬하고, 코언 형제의 여느 작품들보다 기교적으로 느슨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원작자와 연출자가 동일한 전쟁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감상에 있어 일정 부분 면죄부를 제공했다. 실제로 경험한 자들의 증언이란 점에서 조금 더 심각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만일 <어 퍼펙트 데이>를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관찰자적 입장, 그래서 덜 감정적인 태도로 사태에 다가서는 영화라고 가정한다면, 영화가 숨긴 중요한 주제들이 드러날 것이다. 어떠한 급박한 상황이라도 발생할 수 있는 ‘유대적 관계’가 인류를 평화로 이끈다는 보편적 메시지가 바로 그다.
살아남은 인류의 보편적 하루
생각해보면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에서 관객이 발견하는 ‘시체’의 종류는 4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이들 각각을 지표 삼아 영화를 살피면 블랙유머의 그로테스크한 모순점 몇 가지가 해결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흔히 NGO 단체의 인물들이 주인공일 때 목표가 되는 “생명을 구해야 한다”라는 인류애적 대전제를 구실로 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이미 벌어진 죽음의 표식을 중심으로 미래의 환영에 다가서려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기 위해 주인공들은 대부분 실용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필요할 때 곁에 있고,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취지로 행동하는 것이다. 시체를 대할 때도 이 원리는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먼저 첫쨋날 오전에 발견되는 우물 속의 송장을 보자. 낡은 밧줄이 육중한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자, 그는 다시 우물 아래로 떨어진다. 이때 죽은 남자에게 인격을 부여해서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은 그에게 감정적 연결고리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이어 등장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첫 번째 죽은 자와 비교돼 설명되는 것은, 두 번째의 길가에 던져진 동물의 사체뿐이다. 이어서 지뢰가 설치된 함정일 수도 있는 암소의 시체를 주인공 B와 소피가 정면으로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두 시체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미 생명을 빼앗긴 상태로 등장해서 영화가 이들을 다룰 때 생명에 대한 관용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버린다는 점이다.
초반에 드러난 시체의 활용법을 통해 우리는 영화의 인물들이 인간적 관용 대신 ‘규칙의 존중’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예컨대 시체의 표면에 감추어진 이면의 목표를 간파하기 위해 주인공들은 일반적이고도 전통적인 의미와 원칙들을 지워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개인의 선택이 아닌, 집단적 이기심 혹은 집단을 위한 이타심이 이 과정에서 새로운 원리가 된다. 전쟁이 낳은 타협의 시스템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후 벌어지는 생명에 대한 태도나 죽은 자를 대하는 원칙도 이 과정에서 납득될 수 있다. 마치 사실주의적인 카프카의 소설에 벌레 모습을 한 인물이 나타나듯, 전쟁의 목격자들이 전쟁에 부여한 변신의 테마가 바로 시체를 이용한 ‘블랙코미디’의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겉으로 영화는 ‘밧줄 구하기’라는 소소한 목표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실상 보스니아 전쟁이 제공한 인도주의의 대원칙하에서 인물들은 기존의 입장을 뭉개고 하나로 뭉쳐지며 앞으로 나아간다. 즉 살아남은 인류를 위한 타협의 방향으로 전체 의견은 조정된다. 남성에 대한 여성에 대한, 그래서 인간 전체에 대한 어느 하루의 보편적 테마는 그렇게 생성된다.
현실의 어두움이 역설하는 인도주의
세 번째 시체를 발견하는 꼬마 니콜라의 집에서, 우리는 감독이 공들여 구상한 거울방의 구조를 지켜볼 수 있다. 전쟁이 깨부순 연대의 핵심에 ‘가족’이 있다는 점이 이 순간에 드러난다. 그런면에서 가족에 대한 접근이야말로 이 영화가 감춘 또 다른 테마라 부를 수 있다. 이 장면을 떠올려보라. 조각난 유리 파편이 거울 벽에 붙어 있고, 그 아래로 완전히 사라진 어느 가족의 사진이 진열된다. 전쟁이 빼앗아간 잃어버린 구성체를 이제부터는 깨어진 거울 사이로 보이는 새로운 이방인들이 대신 도맡을 것이다. 축구공을 되찾은 아이가 묻어야 할 과거의 기억을, 그리고 미래에 지향해야 할 새로운 지향점을 이 장면은 압축해서 드러낸다. 이 공간에서 죽은 부모의 시체를 발견한 후부터, 모든 인물들은 힘을 합쳐 우물 안의 시신을 빼내기 위한 동일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사태를 직시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통합의 시점에 네 번째 시체가 등장한다. 이미 날이 지고 어둑해진 시간, 높은 산의 언덕에서 주인공들은 죽은 얼룩소 한 마리를 발견한다. 죽은 생명체의 취급법에 익숙해진 상황이지만, 그들은 고민한다. 자신들이 일정한 패턴을 발견했다는 것을, 상대방 역시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즈음 맘브루(베니치오 델 토로)의 옛 연인인 카티야(올가 쿠릴렌코)의 임무가 “구성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란 점이 드러난다. 과연 그들이 돌아가야 할 집은 어디일까. 팀 로빈스가 연기한 이름 없는 B의 캐릭터가 시사하듯, 집으로 돌아가려 결정한 맘브루의 관심사가 대변하듯, 전쟁이란 사태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모든 이들의 집을 뒤흔들어놓았다. 벽지 색깔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지, 결혼식 진행 유무가 관계의 온도차를 다르게 하지 않는지를 그들은 잘못 판단하고 있다. 새로운 집의 의미가 ‘정서적 유대감’이라는 포괄적 결론이 그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렇듯 새롭게 형성된 유대의 문제를 ‘죽은 소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지뢰’가 함축한다고 본다면, 눈앞에 놓인 시체가 숨긴 지뢰의 위험성은 ‘살아남은 자들의 법칙’을 신뢰하는 데서 해결될 수 있다. 이튿날 소와 함께 산길을 헤쳐나가는 노파를 보면서 관객은 단숨에 새로운 세계의 법칙을 상기하게 된다. 반복적이고 모순적으로 서로를 괴롭히더라도, 고난의 해법은 바로 그 역설 안에 담겨져 있다. 마찬가지로 쏟아지는 소나기가 불러오는 카프카적 코미디의 반전은 뒤엉킨 전체의 실타래를 푸는 동시에, 또 다른 상황으로 우리를 내몬다. 전쟁이 끝난 것이 전부가 아니란 점을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한다. “평화는 오겠지만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대사를 빼닮은 듯, 풀리지 않은 문제를 안고 인류는 살아갈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관객의 눈앞에서 무언가가 생명을 잃고 상태가 변환되는 감정적 과정은 영화 내내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니 시체의 기원을 굳이 상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 우리가 바라본 죽은 생명체들의 조롱 섞인 곡예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설적 방식으로 보호하는 현실의 어두움, 이 또한 이 영화가 제시하는 인도주의라면 인도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