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2017)는 흥행에 실패했다. 그리고 최근 여성 혐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영화였다. 나는 개봉된 지 좀 지나서 관객이 별로 없어 한산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드디어 풍문으로만 들었던 장면이 초반에 나왔다. 사이코 살인마이자 북한 고위 간부 자제인 김광일(이종석)과 그 일당이 한 소녀를 납치해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이다. 긴장했지만 예상만큼 길게 반복적으로 강조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관객이 이런 장면을 보고난 후 앞으로 비슷한 묘사에 대해 더 덤덤해진다거나 쇼크에 대한 면역력이 늘어난다고 추정하기도 힘들다. 이 장면은 사이코패스인 김광일의 악행을 적시하기 위해 보여줄 만큼만 보여줬으며 이 장면 이후로 김광일과 그 일당이 저지르는 강간 살인 묘사도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후 장면들에서 잔인한 묘사는 감독이 의식적으로 자제한다는 느낌을 준다.
전략적으로 이런 방식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광란자>(1980)가 생각나는데 영화 초반에 연쇄 살인마가 게이를 유혹해 침대에서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의 충격이 워낙 세서 관객은 이후 비슷한 살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잔뜩 긴장하게 되는데 감독은 그냥 세부를 생략하고 넘어간다. 그럼에도 관객은 도입부의 잔상이 워낙 강해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극의 전개를 위해서든 살인범 캐릭터의 악행 수위를 묘사하기 위해서든 이런 장면은 어느 정도 필수적이다. 일정한 개연성을 주기 위하여 영화에서 묘사되는 살인 장면을 관객이 즐길 거라고 생각하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브이아이피>에서 살인마 김광일의 가학적인 범죄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관객이 그걸 즐길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여성 피해자에 대한 묘사는 잔인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리도 없다. 세상에는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도 있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묘사 자체가 여성 혐오의 증명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물론 보는 사람의 입장에 달린 것인데, 그 입장을 집단화해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도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것이지만, 그걸 평자의 입장에서 창작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이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영화 칼럼니스트 김용언이 그런 주장을 한다. “창작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여성을 이렇게 묘사하는 창작의 자유는 위축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비슷한 주장을 펴는 작가 이민경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걸 전제하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영화는 왜 여자를 죽이고 신체를 훼손하는 영화만 만드냐고 묻는다. 한국 남자배우들이 잔혹하고 폭력적인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실제 삶에서 취하는 것은 개개인에게 매우 윤리적으로 중요한 과제지만 그걸 허구의 영화에 대고 묻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영화에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인간이 나온다고 해서 영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개인이 세상과 맺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영화도 세상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세계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계가 아니다. 치욕적이지만 한국은 프랑스와 달리 여성 대상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일 것이다. 한국영화에 왜 그렇게 여성 대상 범죄가 많이 나오느냐는 질문은 한국 사회가 실제로 비슷한 꼴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걸 소재로 어떻게 착취하느냐의 문제는 소재 선택과는 별개로 좀더 세심하게 물어야 할 사안이다. 이게 분간되지 않으면 우리는 입장을 바꿔서 자기가 옳다고 믿는 수많은 판관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여론이라는 것이 언제라도 파시즘에 봉사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채이도와 리대범이 연민을 자아내는 방식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만든 존 포드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자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존 포드의 영화에 관해 이런 말을 한다. “존 포드는 요즘 세대처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잣대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거침없다는 포드 영화의 인장이 새겨질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나는 거꾸로 박훈정이 매우 거침없이 풀어낼 수 있었던 소재를 매우 조심해서 장르적 관성 안에 둔 나머지 소재의 장점을 애매한 영역에 남겨두지 않았나 의심한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감정이입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들이며 따져보면 저마다의 사정을 갖고 그렇게 행동하는 인물들인데 그들의 행동을 표면적으로 세세하게 그려내는 듯하면서도 관객의 통념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안전한 방식으로 설득하려 든다. 김광일의 캐릭터 묘사를 예로 들면, 이자가 갖고 있는 악마성의 여러 갈래를 익숙한 클리셰의 표징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감독은 자신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데, 외국 소설을 읽고 클래식 음악을 이어폰으로 듣는 해맑은 소년의 이미지에서 악의 이중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하는 안일한 착각으로부터 더 나아가지 않는다.
김광일의 살인행각 묘사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행동할 수 있을 듯이 구는데 의외로 쉽게 허물어진다. 끝까지 강함을 연기하면서 미세하게 균열을 보이는 인물이 아니다. 적어도 나 같은 관객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굉장한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 악행의 근원적 에너지가 있는 인물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이는 이 인물이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는 플롯상의 기능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라는 방증이다. 이 영화에서 김광일을 축으로 다른 주요 캐릭터들이 관객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가 악인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영화의 주요 캐릭터들이 표현하는 악의의 방식이 흥미로웠다. 살인마 김광일은 남자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악의 방식인 성폭행과 살인으로 악의를 표현한다. 그를 잡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형사 채이도는 부하들을 무자비하게 부리는 폭군이다. 국정원 요원 박재혁은 출세를 위해 직속 상사와 짜고 김광일을 기획 입국시키며 그걸 무마하기 위해 새로 온 상사의 허락 아래 국가조직을 사조직 부리듯 하는 사악한 직장인이다. 이자들의 이런 행동이 더 큰 누군가, 또는 조직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들이 서로 각자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악의가 악의를 낳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김광일의 범죄는 전체 사회 체제하에서 무한 관용을 받았지만 그는 환경이 바뀐 상황에서도 보호받는 신분이라는 걸 악용해 계속 살인을 저지른다. 채이도는 국가기관의 관료적 무능에 반발해서 초탈법적인 수사를 마다하지 않고, 박재혁은 관료주의의 허점을 이용해 결과적으로 비인간적인 임무종결방식을 수행한다.
이들의 개인적인 성정과는 상관없이 이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이들의 악의는 반드시 상대의 악의를 낳는다. 악의는 감염성이 있다. 영화 속 주요 캐릭터들은 그들이 서로 접촉할 때 그걸 알아차린다. 상대의 악의를 감지하는 순간, 이쪽도 그에 못지않은 악의로 무장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생생한 캐릭터는 김명민이 연기하는 채이도 형사이다. 그는 여타 영화들에서 빌려온 듯한 이 영화 속 다른 캐릭터들처럼 기시감이 강한 인물인데, 당연히 한국영화에서는 <공공의 적>의 강철중을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이지만, 김명민이라는 연기자의 육체를 빌려 꼴통 마초의 자기 파괴적 속성을 강렬하게 전시한다. 그는 편의적 관료주의라는 내부의 적과 강력한 사이코 살인마라는 외부의 적을 맞이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파괴적인 행동을 불사하며 조직과 자신을 망가트리는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채이도는 그렇게 해야만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자신의 행동이 파괴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방법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힘의 흐름 속에서 악의를 전면적으로 확장하는 캐릭터들의 한켠에 있는 예외적인 인물은 박희순이 연기한 북한 장교 출신 리대범인데, 그는 북한에서 김광일을 제대로 수사하려다 권력자의 미움을 받아 잔인하게 보복당해 부하들을 잃은 채 복수심에 남한으로 건너와 김광일을 잡아 북으로 돌아가려 한다. 개인적인 복수심과 최소한의 정의감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는 김광일을 수사하다 자살한 동료의 희생을 원통하게 여기는 채이도와 비슷한 심정을 나눈다. 채이도가 부하들을 난폭하게 다루고 거친 수사방식을 고집하는 것처럼 리대범도 김광일의 졸개들을 잡아 잔인하게 고문해 범죄 단서들을 찾아낸다. 두사람은 모두 자신들이 속한 국가기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처절하게 버려진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최소한의 연민을 자아낸다.
끝까지 통념을 거스르는
이 과정에서 인과응보라는 것은 없다. 박훈정은 장르영화의 관객 기대 기제인 인과응보를 최대한 배제하는 척하면서 채이도와 리대범의 탈법적인 행위에 수반되는 정의감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좌절시킨다. 앞에서 거론한 소재의 장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관객의 통념을 배반하고 영화 속 인물들의 악의의 상호감염이 점증하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이들의 악의가 이들 자체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종하는 더 큰 대타자들의 악의이며, 이들은 대타자의 인형으로서 그런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비극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어느 지점에서 <브이아이피>는 스스로 멈춘다. 영화가 기대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꽤 흥미로웠는데도 미진한 이유를 생각해보니, 영화가 주요 인물들의 악의와 그에 따른 악행을 표면적으로 꼼꼼하게 묘사하는 정석을 취한 듯했지만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연출이 클리셰에 의존했던 것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균열이 생기는 결정적인 지점, 이를테면 채이도가 빈틈없이 굴던 김광일에게 발기부전이 아니냐고 비아냥대자 김광일이 흥분하는 장면은, 정황상으로 그렇다 쳐도 대사의 강도에만 의존하는 전형적인 연출이다. 인물들의 대화 장면에서 남발되는 클로즈업도 마찬가지다. 영화 초·중반 장동건이 연기하는 박재혁이 박성웅이 연기하는 국정원 상사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이어붙이는 장면은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배우들의 기량이 전반적으로 좋았던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각자의 기운을 갖고 불안을 감춘 채 공격성으로 위장한 협잡질을 상대와 주고 받을 때 감독은 온전히 그 기운을 화면에 잡아놓는 대신 인물들의 얼굴 표정으로 많은 것을 대치하려 하는데, 악의의 감염이라는 이 영화의 소재적 장점을 피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스타 페르소나에 의존한 상업영화가 피할 수 없는 숙명적 패착이었을까. 그렇진 않다고 본다. 박훈정은 관객의 통념을 거스르는 소재를 택해 끝까지 통념을 거스르는 결과물을 내놓을 때 성공했다. <신세계>(2012)는 깡패 못지않게 행동하는 형사가 결국 깡패의 보스가 되는 과감한 결말을 통해 관객의 통념을 부숴버렸다. 그에 반해 <대호>(2015)는 호랑이에게 인간의 심성을 주입함으로써 통념에 기댄 감상주의적 결말로 안주해버렸다. <브이아이피>는 절대 악인의 불안과 상대적으로 그보다는 덜 악하지만 그래도 악행을 멈출 수 없는 인간들의 불안과 슬픔을 건드리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악의 기원을 스케치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