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벽과 창에 균열이 생기며 무너지기 시작한 건물, 그곳에서 도피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이 보이며 영화 <세일즈맨>(2016)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서 밀러의 희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제목을 따왔지만, 주인공 부부는 세일즈맨보다 특별한 직업인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와 라나(타라네흐 알리두스티)는 현재 밀러 원작의 공연을 준비 중이다.
건축물 붕괴에서 시작된 이들 부부의 위기는 이후 정신적 영역으로 옮아간다. 그 결과, 주인공들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영화의 첫 부분과 마지막 장면을 비교해보면 붕괴 위험이 있는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주인공 부부가 아니라 사건의 범인인 늙은 가장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범인은 모두가 우려하던 물리적 파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악행의 심리적 압박 탓으로 죽음을 맞는다. 이처럼 제목이 생략한 ‘죽음’이란 명제는 가시적 영역에서 비가시적 영역으로, 외부의 경험에서부터 내부의 관찰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극 전체를 서서히 움직인다.
어쩌면 영화가 취하는 복잡한 구조는 단순히 구조의 형성 자체를 위해 구상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전작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와 비교하면 더 명확해진다. 유럽에서 완성된 전작과 달리 <세일즈맨>이 촬영된 ‘이란’ 사회의 테두리는 정치적 검열 등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했다. 그러니 이를 벗어나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던 것 같다. 작품이 지닌 복잡한 의미전이의 구조가 조금은 이해되는 부분이다. 실제로 감독은 연극의 배경인 1940년대의 뉴욕처럼, 현재의 테헤란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고 설명한다. “엄청난 속도로 도시의 얼굴이 바뀌고 있다. 과수원과 정원이 사라진 자리에 콘크리트 타워가 들어선다.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말이다.” 이전보다 더 강력한 은유의 장치를 영화에 삽입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과 감정적 혼란
이 작품은 구조의 형태가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이다. 영화 속 연극이 만들어내는 미장아빔 구조를 아주 드문 형식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처럼 정교하게 사용된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일상성과 희극성과의 결합, 둘의 결합만으로도 텍스트는 충분히 흥미롭다. 거기에 영화는 구조적 특별함이 자아내는 풍부한 상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데 최종 목표를 둔다. 이번 영화 역시 전작들처럼 ‘연쇄적으로 파생되는 딜레마’의 장치로부터 주제를 끌어내고 있다. 처음에 굴착기가 발생시킨 물리적인 폭력이 드라마의 출발점이라면, 이후 장소가 발생시킨 불안한 진동은 주인공들의 일상속으로, 그리고 그들이 창작하는 공연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점차 사태를 악화시킨다. 이렇듯 연극이 사건의 감정적 장(場)으로 활용되면서 영화가 추구하는 파동의 영역은 보이지 않는 장소로 이동한다. 언뜻 범죄 스릴러처럼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의 초반 형태가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전작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는 이유이다. 심리적 탐구의 태도는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사실주의를 좀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사 간 새집에서 겪게 되는 사건은 ‘이사 간 집에 놓인 타인의 소지품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에마드와 라나 부부는 새집에 도착하자마자 ‘남에게 공개할 수 없는 것이 공개되었을 때의 수치심’을 역으로 겪게 된다. 이처럼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선택할 수는 있었다. 완전하지 않은 이주의 과정에서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터부의 영역을 넘어서자마자, 다시 말해 전 집주인의 사물로 가득 찬 방문을 열자마자 불운의 뉘앙스가 부부를 덮친다. 이 작은 사건은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구심점이 된다. 하필 그날 라나는 홀로 귀가해 남의 자전거를 집 안으로 옮겼으며, 그 물건 때문에 범인은 그녀를 다른 사람이라 착각했다. 이후 사건의 파동은 점차 감정적인 영역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관객은 멀리서 관찰한다. 짐작 가능한 영역에 대해 감독은 정확한 묘사를 꺼리지만 관객은 나름대로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인이 당한 사건의 전말은 영화에서 자세히 밝혀지지 않지만, 앞서 드러난 사건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던 집주인의 모습도 ‘연극 속 창녀의 모습’을 통해 시각화된다. 이러한 개입은 주제라 할 수 있는 모순적 진실성을 끌어내는 장치가 된다. 이처럼 주인공이 아닌 ‘환경’이 빌미가 되는 시초, 그리고 특정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의 전조’는 구조적 특성과 함께 전개의 개연성을 부여하는 보완적 장치가 된다.
처음에 두 사람은 모두 계몽된 중산층에 속하는, 젊고 열린 사회인들이었다. 하지만 사건 이후 내보이는 저항의 형태는 각자 다르다. 그 과정에서 진실을 요구하는 에마드의 집요한 외침은, 정신적 혼란 속에서 점차 침묵하는 라나의 모습과 대조된다. 아파트가 무너지는데도 침착한 태도를 보이던 에마드는 사건 이후 점점 감정적 폭력성을 드러내고, 진보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그려지던 여주인공은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더이상 혼자 있지 못하는 나약한 개인이 된다. 동일한 원류에서 시작된 상반된 반응의 양태들이다.
하지만 감독은 끝까지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는다. 각자의 입장이 다르듯, 서로가 추구하는 진리도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킬 뿐이다. 연쇄적 사건이 아닌, 감정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던 영화는 그렇게 점점 커다란 반전을 향해 나아간다. 후반부에 드러나는 ‘늙은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결말은 이 고조된 격차 속에서 생성되는 반작용이라 부를 만하다. 그리하여 남자주인공 에마드가 ‘폭행의 정체성’의 진짜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마침내 관객은 되묻게 된다.
열린 관찰을 유도하는 감독
‘개인의 보호’라는 사회적인 책무는 누군가에게는 기본권으로서 ‘생존권의 영역’에 속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명예의 방어’라는 욕망의 장치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영화 속의 남자주인공은 명예에 대한 방어로써 범인 색출에 돌입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운명은 바뀐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에 대비되는, 이란의 한 늙은 가장은 그렇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의 시선이 생성하는 무거운 형벌을 받는 새로운 주인공이 된다. 그 속에서 희극의 세일즈맨을 연기하던 에마드는 입장이 전환되어 타인에게 죄를 추궁하는 역할이 된다. 앞서 분석했듯 영화를 개인의 소유물에서 시작된 ‘수치심에 대한 보고서’라고 읽는다면, 현대적 의미에서 개별적 도덕의 기준에 감독은 열린 관찰을 유도하고 있다. 어느 한쪽 손을 잡아주지 않는 시선의 교차가 그래서 중요하다. 심지어 이러한 관찰을 영화가 추구하는 진짜 미장센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 시선의 이동은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연쇄적 딜레마의 끝자락에서 관객 또한 영화의 결말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선택이 감독이 던지는 질문의 위치처럼 확고부동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그 얼터너티브의 영역까지 나아가는 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인 합의를 넘어서, 평범한 사건을 비범하게 내어놓는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방식에 대해 관객도 수긍하게 될 것이다.
만일 승자와 패자의 운명 속에 일치하지 않는 두개의 결말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영화는 이 상반된 결말들 모두를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영화의 바깥에 있는 진짜 세상, 모든 것을 담고자 하는 결말이 관객을 매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