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러브>(2009)를 보면서 루카 구아다니노가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를 탐하는가 싶었다. <비거 스플래쉬>(2015)를 보다 비스콘티의 이름을 슬며시 지우기로 했다. 구아다니노의 영화에 귀족형 노스탤지어나 엄격한 스타일은 없다. 차라리 그는 귀족을 닮으려 환장한 인간들을 다루는 쪽에 가깝다. <아이 엠 러브>에서 러시아 복원가의 딸 엠마는 밀라노의 사업가와 결혼하면서 고향을 잊는다. 그녀는 성공한 부르주아의 삶을 몸에 새기며 살았다. 아들의 죽음으로 그녀는 가면의 삶을 깨닫는다. <아이 엠 러브>가 귀족을 열망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이라면, <비거 스플래쉬>는 신흥 귀족으로 행세하는 문화 권력의 삶으로 시선을 돌린 영화다. 마리안은 스타디움의 관중 앞에 서기 전 침을 퉤 뱉는 가수였다. 과로로 목수술을 감행한 그녀는 판텔레리아 섬에서 안락한 휴가를 즐긴다. 어딜 가나 최고급 복장에 우아한 행동을 잃지 않는 그녀, 과연 어떤 게 그녀의 본모습일까.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
<아이 엠 러브>와 <비거 스플래쉬>를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욕망’이다. 철지난 단어인 ‘성과 정치, 계급, 금기’ 등을 쏟아내면 구아다니노의 영화를 설명하기가 쉬워진다. 그의 영화는 리나 베르트뮬러(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1970년대에 만든 이탈리아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수면 아래 있던 아들과 아들 친구와의 삼각관계가 풀장의 사고로 전면에 드러나는 <아이 엠 러브>의 방식은 <비거 스플래쉬>에서 반복된다. 마리안과 연인 폴의 빌라로 마리안의 전 연인 해리, 해리의 딸 페넬로페가 방문하면서 사각의 욕망이 조용히 끓어오른다. 그리고 <아이 엠 러브>처럼 풀장의 사고로 관계는 일단락된다. <비거 스플래쉬>에서 1970년대 냄새가 흘러나오는 건 당연하다.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1969)을 리메이크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오종의 <스위밍 풀>(2003)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수영장>의 스토리를 <비거 스플래쉬>는 거의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결말까지 거의 비슷하게 반영한 <비거 스플래쉬>의 정서와 <수영장>의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 <수영장>의 마리안과 폴이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는 반면, <비거 스플래쉬>의 마리안과 폴은 (숨겨진 의미가 어떤 것이든) 빗속에서 웃음을 짓는다.
같은 이야기와 비슷한 결말인데 왜 두쌍의 마리안과 폴은 다른 표정을 짓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비거 스플래쉬>를 욕망에 관한 이야기로 읽기를 관두기로 했다. 오리지널과 리메이크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비거 스플래쉬>에만 들어 있는 것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29분. 어떤 노동도 하지 않고 수영장에서 남아도는 시간을 보내던 그들 사이로 누군가의 통화가 들린다. “튀니지에서 온 배가 세척 난파되었다”는 말이 흘러나오지만 이내 화제는 그들의 문제로 넘어온다. 37분. 축제에 나선 그들 중 누군가가 “난민들을 숨긴 배가 적발되자 브로커가 그들을 바다에 내던졌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주제는 곧 튀니지의 재스민 향으로 바뀐다. 성자의 행렬 앞에서도 선배의 영화 <이탈리아 여 행>(1953)처럼 에피파니를 경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1시간10분. 마리안과 해리가 치즈 제조를 구경할 동안 TV에선 난민 문제가 보도된다. 난민들은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1시간40분. 마리안과 폴은 경찰서를 방문한다. 경찰서 앞으로 난민을 임시로 수용한 공간이 보이고 난민들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두 사람은 보거나 듣지 않는다. 그리고 1시간45분. 마리안은 경찰서장과 범죄를 공모하기로 은밀히 합의한다. 경찰서장은 말한다. “람페두사 섬엔 난민이 원주민보다 많아요.”
그러게, 판텔레리아는 람페두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작품은 잔프랑코 로시의 <화염의 바다>(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다)다. 나는 두편의 이탈리아영화가 비슷한 방식으로 난민 문제에 접근한 것에 주목했다. 난민의 섬인 람페두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이미 여러 편 만들어진 바 있는데, 로시가 람페두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다르다. 로시는 두개의 축으로 다큐멘터리를 전개한다. 한축은 소년과 아버지, 할머니를 중심으로 원주민 사회를 보여주고, 다른 한축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오는 난민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상한 일은, 조그만 섬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임에도 양축이 전혀 교차하지 않는다는 거다. 소년과 가족은 흡사 난민이란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양 생활한다. 며칠이 멀다하고 난민들의 죽음이 전해지지만, 그들은 뉴스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로시가, 소년의 가족이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을 몽타주해 거대한 우주적 풍경화를 완성하는 로시는 지구가 얼마나 결핍된 우주인지 보여줄 따름이다. 그 결핍이 슬픔을 만들어낸다.
타인의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마리안의 세계
로시의 슬픔은 <비거 스플래쉬>로 건너와 구아다니노의 조롱으로 바뀐다. 정확하게 말해 그게 분노인지 조롱인지 나는 모르겠다. 영화 내내 난민 문제에 무심하던 마리안은 클라이맥스에서 난민을 범죄자 집단으로 내몰고, 죽음의 항해를 거친 난민은 이유도 모른 채 백인 사회에 의해 굴욕을 당한다. 빵과 케이크에 관한 앙투아네트의 말은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거 스플래쉬>를 보노라면 그게 ‘차가운 피’ 때문임을 알게 된다. 무지 상태에선 각성할 수 있으나 차가워진 피를 다시 데울 방법은 없다. 한 공간 아래 공존하는 여러 현실 가운데, 마리안의 세계 안에서는 자신의 현실만 숨을 쉰다. 현실이란 인식이 개입되는 어떤 것으로 한정할 때, 주변에서 끊임없이 타자의 현실을 인식하게 만듦에도 그것들은 그녀의 현실로 자리잡지 못한다. 타자에 대한 몰이해는 그들 계급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해리가 죽은 날, 마리안은 페넬로페에게 “아프냐”고 묻는다. 소녀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답한다. 마리안은 그 답을 이해할 수 없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 자기 연인과의 관계에 대해 묻고 있었던 거다. 소녀는 곧이어 폴로부터 또 다른 폭력을 당한다. 그는 소녀가 살인의 현장을 목격했는지 따진다. 마리안과 폴에게 소녀의 상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들의 몸에는 차가운 피가 흐른다. 살인을 은폐한 그들이 웃는다 해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비거 스플래쉬>는 장 뤽 고다르의 <주말>(1967)의 대사를 되새기게 만든다. 아프리카의 전쟁과 비극은 유럽의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돕는 게 아니라 죄를 씻는 것으로 여겨 마땅하다. 하물며 아직도 손을 놓거나 착취하고 있어서야 어디.
PS. <아이 엠 러브>의 음악은 현대음악가 존 애덤스가 맡았다. 애덤스의 표제음악들은 평소 그가 얼마나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알려준다. 작곡가들은 우주의 기호로 창작하면서도 현실과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얼마 전 구입한 존 케이지의 《다이어리》 음반을 듣는 중이다. 케이지는 총 10편을 구상했으나 8편만을 남기고 죽었다. 8장의 음반은 음악이 아닌 내레이션을 담았다(볼륨도 들쭉날쭉하다). 그가 길고 긴 일기에서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부제가 압축적으로 전한다. ‘세상을 개선하는 법.’ 노인의 낙관이 참 나이브하다며 웃다가도 그가 부제의 뒤로 따로 적어둔 문장- 당신은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들 뿐이야- 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당신’에 마리안과 폴만 포함된 게 아닌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