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풍광은 압도적이다.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칭으로 관광객을 유혹하는 타이항 산맥에서 촬영된 이 작품은 겹겹이 싸인 서사의 비밀을 따라가는 재미만큼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감상하는 쾌감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서사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영화의 문을 매혹적으로 열어주었던 그 능선에 아로새겨진 인간들의 가혹한 욕망으로 인해 그 풍경이 더이상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행지로 방문한 곳의 매력이, 생활공간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좀처럼 유지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현재는 ‘오해’를, 플래시백은 ‘이해’를…
이 영화의 서사는 ‘오해’와 ‘이해’의 과정을 반복한다. 아침을 준비하는 홍시아(량예팅)를 남편 라홍(여애뢰)이 침대로 끌어들인다. 거칠게 반항하는 홍시아와 라홍의 관계는 그 이후 라홍이 딸에게 장난을 치는 스스럼없는 태도 때문에 새침한 아내와 터프한 남편의 관계처럼 오해된다. 반면 산 건너편의 애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애정공세를 퍼붓는 이웃 청년 한총(왕쯔이)은 철없고 무책임한 사내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관객은 한총이 오소리를 잡기 위해 설치해놓은 덫 때문에 라홍이 다리를 잃어 죽게 되었을 때 한총의 부주의와 무책임을 나무라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동조하게 된다. 졸지에 가장을 잃고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어린 엄마의 모습과 그녀를 부양해야 한다는 마을 회의의 결과에 반항하는 한총의 태도는 그같은 ‘오해’를 부추긴다.
그런 ‘오해’로 인해 마을 주민들은 라홍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홍시아의 기이한 태도를 부주의하게 넘겨버린다. 물론 이 오해의 진짜 근간은 이 산간 마을에서 완벽한 타자인 홍시아에 대한 무관심이다. 홍시아는 남편이 죽자마자 슬퍼하기는커녕 집 안을 샅샅이 뒤져 비누를 꺼내고 천연덕스럽게 머리를 감는다. 그녀는 장례식에서 남편의 관에 흙과 돌멩이를 던지며 발작하듯 오열한다. 그 오열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린 아내가 가장을 잃은 슬픔을 극렬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한 마을 사람들은 그녀보다 더 서글프게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의 흐느낌을 듣던 홍시아는 낄낄대며 웃지만 그녀의 웃음은 슬픔에 겨운 광기 정도로 또다시 ‘오해’된다.
홍시아가 이장을 대리하는 마을 대표의 주재하에 남편의 사망에 대한 보상금을 합의하는 장면 역시 ‘오해’의 연속이다. 마을 어른인 의사 선생은 그녀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멋대로 ‘무지하다’로 해석해버린다. 그리고 라홍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보상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태도 역시 무지 혹은 슬픔으로 인한 경황없음으로 해석된다. 그녀가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그것이 그들이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그녀의 사정을 짐작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영화는 이 장면 이후에야 홍시아의 ‘플래시백’을 통해, 그녀가 마을 사람들이 상상하는 ‘거지(라홍)의 벙어리 아내’가 아닌 양갓집에서 곱게 자란 홍시아였음을 알려준다.
그렇게 이 영화의 서사적 ‘현재’와 ‘과거’ 플래시백 사이의 경합이 시작된다. 현재는 ‘오해’를, 플래시백은 ‘이해’를 가져온다. 토막난 플래시백들은 홍시아가 어린 소녀일 때 라홍에게 납치되었고, 홍시아는 라홍이 아내를 죽인 사실을 엿들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혀를 잘려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녀는 사내에게 납치 유괴되었고, 이후 강간당하며 두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이제 관객은 영화의 첫 장면의 의미를 다시 읽어야만 한다. 홍시아는 새침한 아내가 아니라 아동성폭행 피해자이자 여전히 감금 납치된 상태로 강간당하는 아내였다. 그녀에게 라홍의 죽음은 가장의 상실이 아니라 감금으로부터의 해방이자 복수였던 셈이다.
처음에는 의무로 시작되었던 한총의 부양은 점차 애정으로 전환된다. 홍시아는 라홍의 죽음 이후 그에게 어떤 종류의 의무감을 부여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점차 자발적인 것이 되어간다. 그리고 둘의 감정을 제일 먼저 정확하게 짚어준 것이 한총의 아버지였다. 그는 서사적 ‘현재’에서 나름의 지각과 양심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지만, 의사 선생과 나눈 대화를 통해 밝혀진 ‘과거’에 의하면 한총에게 그 누구보다 깊은 상처(어머니 폭행, 주정, 부재)를 준 인물이다. 플래시백으로 매개되지는 않지만 그의 과거에 대한 정보는 역시 현재 한총 부자에 대한 오해- 반항적인 아들과 자애로운 아버지- 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오해되는 ‘현재’와 이해로서의 ‘과거’라는 서사의 반복적 패턴은 이른바 반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서사적 트릭을 형성한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풍광 속에 펼쳐지는 멜로드라마 같은 외피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반전에 반전을 잇는 범죄 드라마다. 그림 같은 풍경은 장르를 오인하게 만들어 관객의 긴장을 무장해제시키는 장르적 ‘맥거핀’ 혹은 양파같이 벗겨도 벗겨도 끝나지 않는 진실을 암시하는 상징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을 옹호하는 애매한 결과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결말의 반전은 관객이 목격했던 ‘현재’를 진실을 폭로하는 ‘과거’로 전환시킨다. 초반에 라홍이 죽어가던 시퀀스에서 그가 손에 들고 있었던 아기사과- 딸이 라홍에게 구해달라 부탁한 것- 는 ‘부성애’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라홍의 살인범임을 자백하는 홍시아의 자술서를 통해 그것이 그녀의 치밀한 계획에 포함된 미끼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녀는 한총의 덫을 활용해 라홍을 제거하려 했고, 다리를 잃고 신음하던 라홍을 베개로 질식시켰다.
그런데 이 자백은 영화가 그때까지 폭력이라고 묘사했던 행위들을 옹호하는 애매한 결과를 빚는다. 주민으로 등록되지도 않은 홍시아 일가 때문에 한총과 마을 전체가 공권력의 억압을 받으리라는 공포에 질린 마을 주민들이 그녀를 쫓아내려 하며 보여준 집단적 ‘광기’. 그것이 절차적으로 옳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중적 요구에 가장 충실하게 부합하는 ‘반전’을 위해 고안된 자백 시퀀스는 산촌 마을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호모사케르 홍시아’를 ‘살인범 홍시아’로 전락시켜버린다. 덕분에 아름다운 풍광의 판타지 속에 숨겨져 있던 집단 이기주의의 폭력성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표면을 보느라 진실한 이면을 놓쳤던 우매한 인간들에 관한 도덕적 교훈 역시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진실이 은폐되는 편이 오히려 나았을지 모른다.
과거와 현재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며 진실게임을 벌이는 구성적 트릭의 한계는, 까다로운 소재에 접근하면서도 그 무게를 감당하는 데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연출의 안이함과도 관계가 있다. 또한 영화는 캐릭터 해석에서 있어서도 지나치게 순수하다. ‘1984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혹은 ‘제5세대’ 감독들이 1980년대에 제작했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과 비교해보더라도 홍시아는 지나치게 복고적인 매력만 강조되어 있다.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시종일관 목소리를 잃은 가련한 피해자다. 어쩌면 홍시아는 라홍에 의해 그리고 이 영화의 반전을 위해 이중으로 애처로운 피해자의 자리에 억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작품에서 ‘과거’가 현재의 ‘오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것은 단지 서사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플래시백 남발과 감정을 자극하는 음악의 과도한 활용 그리고 캐릭터 활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들이 작품 자체를 영화사적 ‘과거’로 회귀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