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있긴 있는 겁니까?” “궁금은 하네요.” 영화 초반, 강동원이 던지는 이 말은 바로 관객이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를 보기 전 떠올리는 질문이다. 한국 공포영화사에서 ‘구마’(驅魔, exorcism)는 이례적인 낯선 소재다. ‘장미십자회’, ‘12형상 악마’ 같은 단어는 서구영화에서 종종 들어봐 생소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신부가 악령 들린 소녀에게 구마의식을 치른다는 설정은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가톨릭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종교가 된 지는 오래지만 그와는 별도로 기독교적인 악마를 인정하는 정서가 일반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검은 사제들>이 넘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은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엑소시즘이 행해지는 배경에 대해 관객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검은 사제들>은 매우 영리하게 첫 번째 장애물을 넘어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토록 서구적인 포장지 안에 한국 공포영화의 엑기스를 담아 새로운 공포 장르의 맛을 만들어냈다. <검은 사제들>이 초반 장애물을 넘어가는 방식과 어떻게 서구적인 외연에 한국적인 내포를 담아냈는지 살펴보자.
<엑소시스트>와 <검은 사제들>의 결정적인 차이
세련된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지나가고 영화는 로마 가톨릭 성당에서 두 신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바로 넘어간다. 대화의 요지는 한국에서 12형상 악마 중 하나가 발견되었다는 것이고, 대화를 나누는 두 신부가 직접 한국에 가서 악마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악마가 서구의 기독교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전제를 마련한다. 이어서 두 신부는 서울에 나타나고 12형상 악마를 포획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악마를 완전하게 몰살하기 위한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를 몰던 중 여고생을 치는 사고가 발생하고 두 신부는 처참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풀려난 악마는 여고생의 몸속으로 숨어들고 본격적인 영화의 서사가 시작된다. 여기까지 스토리는 단숨에 진행되고 관객은 한국의 평범한 여고생이 12형상 악마가 씌운 부마자(악마의 숙주)가 되었다는 배경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엑소시즘을 다룬 영화를 떠올릴 때 대부분 <엑소시스트>(감독 윌리엄 프리드킨, 1973)를 연상하게 된다. 상당수의 관객에게 가장 무서운 오컬트(occult)영화로 기억되는 <엑소시스트>는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검은 사제들>의 정보를 본 사람들은 <엑소시스트>를 떠올리게 되고 <검은 사제들>을 본 관객도 두 영화 사이의 유사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일 뿐 막상 두 영화를 비교하면 상이한 점이 더 많다. <엑소시스트>는 상영시간의 4분의 3 정도를 소녀에게 악령이 들어왔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데 할애하고 있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1970년대 미국에서 악령의 존재를 관객에게 인지시키기 위해 그만큼의 시간을 소비한 것이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초음파 등 진단을 하고 검사를 하는 과정에 상당 시간을 할애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 악령 들린 소녀라는 소재를 관객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스토리 구성이었으며 당시로선 필수적 요소라고 인정된다. <엑소시스트> 하면 대부분 소녀의 목이 180도 돌아가고, 침대가 공중으로 떠오르고, 아이의 입에서 초록색 토사물이 쏟아지는 장면만을 기억하지만 사실은 이런 장면보다 배경 설정에 상당한 시간을 배분한 영화다. <엑소시스트>에서 엑소시즘 장면은 영화의 뒷부분에 집중되어 있고 CG가 발달된 지금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무서운 장면들도 아니다. 다만, 유약한 인간이 악령에 의해 무시무시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공포심을 유발한다.
<검은 사제들> 같은 경우 악마의 유래를 어떻게 처리할지 곤혹스러운 지점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상황에서, 이것은 원래 외래의 것인데 한국에 출몰했다, 그리고 출몰한 이상 퇴치해야 한다, 라는 아주 간결한 인과관계로 서두를 마련한 <검은 사제들>의 전개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엑소시스트>와 <검은 사제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악령의 유래에 대한 해명 부분이다. <엑소시스트>는 중동의 유적 발굴 현장에서 기이한 유물이 발견되고 이것이 미국으로 전달된다는 식의 설명이 영화 서두에 전개된다. 1970~80년대 할리우드영화 서사에서, 주로 중동에서 사건 발단의 기원이 되는 오리엔탈리즘은 모든 장르를 불문하고 상투적으로 통용되었다. <파라다이스> 같은 청춘남녀의 결합도, <인디아나 존스> 같은 액션도 바탕에 깔린 것은 이국적인 동양이라는 배경이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검은 사제들>은 오리엔탈리즘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럼 서구적인 악마와 엑소시즘을 지금, 여기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너무 궁금했다. 결과는, 정교하고 차분하게 처리했다. 21세기 가톨릭은 “이성적이고 대중적인 종교”라는 신학교 학장의 말이나, “공식적으로는 허가할 수 없습니다”라는 주교의 선언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 갖고 있는 의심이나 불신을 대변하며 이면적으로는 그럼 비공식적인 것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바로 어리바리한 부사제(강동원)가 처음 던진 질문을 공식적으로 교구에서 돌파하는 장면이다. 더불어 “참 이중적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은 축복하고, 악마 이야기를 하면 이단으로 몰아붙이고”라는 김 신부(김윤석)의 대사는 관객의 심중을 파고드는 묘안이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이성과 합리를 넘어서는 문제를 논할 때 입장은 판이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의 문제다. 그렇다면 <검은 사제들>은 더욱 자기 장르에 대한 의식이 투철하다. 본래 공포는 이성과 합리를 벗어나야 하는 장르라는 점을 이토록 명징한 대사로 표현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여성이 아닌 남성이 주인공인 공포영화
이제 구마(엑소시즘) 장면의 미장센으로 넘어가자. 앞에서 이야기했듯 1970년대 <엑소시스트>는 많은 관객의 뇌리에 기억됨에도 불구하고 특수효과나 CG 발달의 측면에서 보자면 시시할 수도 있다. 심리적인 공포효과 창출에는 탁월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기술적 진보는 어렵다. <검은 사제들>은 구마 장면의 미장센에서도 매력적인 요소를 충분히 갖추었다. 바퀴벌레와 쥐떼 등이 출몰하는 화면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지 않은 원관념으로서 악마에 대한 가시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강동원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강동원이 아니라면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동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궁금은 하네요”라고 물어본 강동원이라는 그저 그런 신학생이 진짜 구마 신부가 되는 과정은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시간과 일치한다. 그가 갖고 있는 여동생에 대한 트라우마는 적절한 선택이다. 2000년대 한국 공포영화는 보통 가족관계의 트라우마에 기초하고 있는데 거의 모성에 집중된 성향이 있다. 그런데 오빠/여동생 관계는 흔치 않을 뿐 아니라 강동원이라는 배우를 영화적으로 활용하기에 참 적절한 선택이다. 트라우마에 대한 과거회상 장면을 너무 길거나 빈번하게 쓰지 않은 것도 <검은 사제들>의 장점이다.
원혼, 가족관계의 트라우마, 무속, 이런 모든 소재를 엑소시즘이라는 낯선 소재 안에 차곡차곡, 그러나 체하지 않게 담아넣은 게 <검은 사제들>이다. 2000년대 한국 공포영화는 대부분 원혼과 모성이라는 주제로 환원된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 공포영화의 주인공은 여성(가임기 여성)이 대부분이다. <검은 사제들>은 소재의 특수한 점도 있지만 한국 공포영화의 주인공으로 남성을 소환했다는 점에서도 기념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