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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영화비평] 의미 없음의 의미

<아메리칸 울트라>가 지향하는 무가치함과 무도덕성

<아메리칸 울트라>

이란계 영국인인 니마 누리자데는 저명한 정치 활동가인 알리레자 누리자데의 아들이자 CF와 뮤직비디오계의 스타이다. 그런 사람이 미국에 건너와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지 짐작해보자. 정치적인 영화일까, 아니면 감각적인 스타일의 영화일까. 선입견이 하나둘 쌓이기 전에 한국에서 홈비디오로만 선보인 데뷔작 <프로젝트 엑스>(2012)에 대해 우선 말해야겠다. 멀리 <애니멀 하우스>(1978)부터 <슈퍼배드>(2007)에 이르는 선배를 둔 <프로젝트 엑스>는 미국의 고등학생이 꿈꾸는 욕망이 어느 정도의 바닥으로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시험하는 장이다. 앞서 말한 두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한심함은 비교할 바가 안 된다. 주인공 소년은 생일 파티에 예쁜 소녀들이 몇명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을 뿐인데, 악동 친구를 둔 덕에 하룻밤 파티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 술, 음악, 섹스, 약은 기본이고, 천명이 넘는 인원이 몰린 파티에서 통제 불능의 집단 광기가 일어난다. 급기야 특수부대가 투입되면서 파티는 TV에 생중계되는 상황이 된다. 동네는 불타고 부모는 파산하며 주인공 소년은 대학 입학은커녕 평생 빚을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인다. 이걸 왜 보고 있을까,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한편으로 미국에서 이 영화가 어떻게 해서 흥행에 성공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프로젝트 엑스>의 세 주인공 소년은 평범하다 못해 바보처럼 보이는 아이들이다. 그들이 하는 멍청한 짓은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다. <프로젝트 엑스>에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누리자데의 태도다. 그는 파티의 기록을 명목으로 시종일관 카메라의 현존을 인식하도록 한다. 때때로 비디오카메라가 찍지 못할 경우에는 휴대폰 카메라가 대신한다. <프로젝트 엑스>에서 관객이 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에 카메라에 포착된 10대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보고 기록해놓은 카메라의 이미지는 빠르게 전파된다(영화는 호주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누리자데는 말하는 듯하다. “이러한 삶을 기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쓸모없는 사람은 살아서는 안 되나?

<아메리칸 울트라>는 누리자데의 두 번째 영화다. ‘프로젝트 엑스’라 명명된 하우스 파티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사라지고, ‘프로젝트 울트라’라는 이름의 CIA 비밀 계획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는 두 남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작이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를 배경으로 했다면, 이번 영화는 웨스트버지니아의 깡촌을 배경으로 한다. 미국의 거대한 땅은 플롯에 흥미진진함을 더하는 요소를 제공해왔다. 외부와 단절된 시골 마을에 바깥으로부터 방문자가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근사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메리칸 울트라>에 영향을 준 여러 영화의 리스트에서 맨 앞에 놓여야 하는 건 ‘오지와 방문자에 관한 영화들’이며, 그중 극명하게 대비되는 영화는 <블랙 록에서의 흉악한 날>(1955)이다. 정체불명의 남자 맥크리디가 하루 일정으로 블랙 록 정거장에 내린다. 블랙 록은 열차가 4년 동안 한번도 멈춘 적이 없는 시골이다. 한쪽 손이 없는 이방인으로 분한 스펜서 트레이시는 로버트 라이언, 어네스트 보그나인, 리 마빈으로 구성된 역대급 악당과 상대해야 한다. 종전 직후를 배경으로 한 <블랙 록에서의 흉악한 날>은 기이하게도 일본계 정착민에게 가해진 범죄를 추적하는 영화다. 영화는 주인공과 악당들의 정체 대신 그들을 엮는 하나의 범죄를 파헤치고 해결하는 데 주력한다. 할리우드 고전기의 끝자락에서 생존했던 감독 존 스터지스는 영화가, 혹은 영화의 인물이 지녀야 할 도덕성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마저 잃는다면 그들이 통과했던 시간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울트라>의 마이크와 피비는 CIA의 비밀 프로젝트에 관여했다 프로젝트의 중단으로 시골 마을에 정착한 인물들이다. 과거를 잊은 마이크와 달리 요원인 피비는 과거를 숨긴 채 살아간다. 그들의 현재는 마약쟁이의 삶이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시간 외에 두 사람은 마약이 만들어준 천국에서 지낸다. 마이크는 피비와의 관계를 좋은 의미로 ‘완전히 말아먹은 커플’(perfect fucked-up couple)이라 정의한다. <프로젝트 엑스>의 소년이 가던 길로 계속 걸어가면 마이크와 만나게 될 것이다. 마이크와 피비 역의 제시 아이젠버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어드벤처랜드>(2009)에서 놀이동산의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두 대학생으로 공연한 적이 있는데, 모험이 없는 삶을 비꼰 제목에서 보듯이 평범한 두 대학생의 우울한 미래가 마이크와 피비라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방문자로 기능하는 CIA쪽의 상태도 별로 다르지 않다. 마약에 찌는 두 인물을 상대로 그들이 행하는 작전은 어처구니가 없다. 작은 마을을 봉쇄해 조용히 일을 처리해도 욕을 들을 판에 폭발과 굉음이 뒤섞인 살인 파티가 벌어진다. <프로젝트 엑스>에 그나마 있었던 일말의 현실성은 <아메리칸 울트라>에 와서 사라지고 만다. 영화를 보다 웃으면서도 나는 또다시 질문하게 된다. 누리자데는 이 영화를 왜 만든 것일까. <블랙 록에서의 흉악한 날>, 그리고 <프로젝트 엑스>와 <아메리칸 울트라>에서 인물을 판단하는 공통적인 기준은 ‘쓸모’다. 한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쓸모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작품이 전자라면, 누리자데의 영화는 쓸모없는 사람은 살아서는 안 되느냐고 따지는 쪽이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마저 조롱하는 영화

치치 마린과 토미 청의 <업 인 스모크>(1978) 이후 마약쟁이를 다룬 코미디의 인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 계보에 선 마이크와 피비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마약쟁이 코미디가 희희낙락거리는 맛에 찾는 바보 같은 작품들이었던 것과 달리 누리자데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존재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부여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교훈적인 성격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 <프로젝트 엑스>의 엔딩에서 주인공 소년은 사랑의 가치에 대해 깨닫는데, 누리자데는 배경음악으로 그룹 ‘The XX’의 <인트로>를 사용했다. 엔딩에 인트로라니, 게다가 부정의 강조도 아니고 부정의 부정도 아닌 XX라니. 누리자데의 태도는 그러하다. <아메리칸 울트라>의 엔딩은 올해 나온 가장 쿨한 영화인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마저 조롱한다. 그는 마약에 찌들어 살던 초능력 청년이 양복을 입은 특수요원이 된다는 설정을 스스로 비웃는다. 세상에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하냐는 투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하층민 소년이 마침내 신사의 상징인 우산을 이용해 악당과 싸우는 것과 반대로, 마이크는 숟가락, 쓰레받기, 프라이팬, 칼, 망치 같은 생필품을 무기로 삼는다. 살기 위해 싸울 뿐인 마이크의 모습은 어느새 그가 그리던 원숭이(보기에는 고릴라다)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 무가치함과 무도덕성을 지향하는 이런 유의 영화가, 고전기와 뉴아메리칸 시네마를 거친 할리우드의 현재형이라고 말할 마음은 없다. 게다가 누리자데의 영화에 나오는 인간형이 미국의 청춘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든다. 누리자데가 발견한 무가치의 특성은, 프랑스인이자 유명 DJ이면서 미국으로 건너와 몇편의 독립영화를 만든 쿠엔틴 듀피욱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듀피욱스가 <광란의 타이어>(2010), <그건 아니지>(2012), <배드 캅>(2013)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영화와 현실의 ‘의미 없음’이다. 그래서 이들의 영화에는 ‘네거티브 시네마’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어떤 것은 이방인의 눈에 더 잘 보이는 법이다. 또 아는가, 의미 없음의 의미를 알게 될 날이 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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