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의 속편이 나올 거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제법 그럴듯한 상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표현의 행간을 좀더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이하 <로그네이션>)은 분명 기대만큼의 재미를 정확하고 안전하게 제공하는 영리한 블록버스터다. 적절한 타이밍에 볼거리를 제공하고 필요한 디테일은 일부러 프레이밍까지 해서 확실하게 보여준다. 인물의 심리를 적당히 짐작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혹여 부족할까 일일이 대사로 설명까지 해주는) 과도한 친절은 이 시리즈가 다수의 관객이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을 지향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나쁘다는 게 아니다. <로그네이션>의 연출은 계량화된 공식의 완성형으로서 탄탄함을 자랑하는, 상업영화의 총아다. 기본적으로는 다섯 번째 속편임에도 늘어지기는커녕 1편으로 회귀하는 듯한 에너지에 대해 경탄했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가 더 보고 싶은지 묻는다면 이제 그만 에단 헌트를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매번 놀라움을 안겨줬던 에단 헌트의 필사적인 스턴트의 방향, 그가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바에 대해 문득 피로감이 몰려왔다.
톰 크루즈의 무한도전
<로그네이션>의 타이틀 시퀀스는 노골적이다. 현장요원으로 거듭난 팀의 테크니션 벤지 던(사이먼 페그)이 위장엄폐의 정석대로(하지만 우스꽝스럽게) 엎드려 있고 관리자 격인 브랜트(제레미 레너)가 비행기를 멈출 수 없냐고 다그친다. 또 다른 테크니션 루더(빙 레임스)가 타국에서 위성 해킹을 하자 결정적인 순간 에단 헌트가 달려와 활주로 위 비행기에 달라붙는다. 실제 공중에 뜬 비행기에서 촬영됐다며 홍보에도 수차례 활용된 이 맨몸 스턴트는 에단 헌트의 무모함과 전능함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단지 그뿐이다. 대체 이 장면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 거창한 오프닝 시퀀스는 잘라내도 이후 전개에 아무런 이상이 없을 만큼 독립적이다. 정확히 광고에 가깝다. 여기서 주어진 정보라고 해봤자 몇 마디 대사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필사적으로 이 장면을 최우선으로 전시하는 태도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에단 헌트를, 아니 톰 크루즈를 대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오프닝의 스펙터클에 현혹된다. 극한에 가깝게 혹사당하는 톰 크루즈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리얼리티는 그대로 경탄의 대상이다. 의심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스펙터클을 완성하는 요소의 상당 부분이 에단 헌트가 아니라 톰 크루즈라는 배우가 실제로 벌이는 ‘임파서블’한 액션 스턴트에 있다는 점에서 이 속편의 성취가 조금은 이상해 보였다. <로그네이션>이 관객을 경탄시키는 초점은 종종 영화 바깥에 맺혀 있다. 우리는 에단 헌트라는 라텍스 가면을 쓴 톰 크루즈를 보고 있는 셈인데, 문제는 보는 내내 완벽하게 속지 않고(에단 헌트에게 몰입하지 못하고) 톰 크루즈의 육체를 응시한다는 점이다. 에단 헌트의 위태로움은 톰 크루즈의 무모함과 겹치지 않는 한 그 빛을 잃는다. 매번 기존에 보여준 것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게 속편의 운명인 까닭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에단 헌트의 내면이 아니라 톰 크루즈의 서커스에 기대 이를 충족시켜왔다. 관객이 현혹된 대상이 영화 바깥 극한의 도전을 이어가는 배우의 행보라는 사실은 첩보물로서 <미션 임파서블>의 생명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안타까운 증거다.
<로그네이션>은 얼핏 2, 3, 4편에 비해 서스펜스가 강화되고 좀더 우아한 리듬과 편집에 신경 쓴 것처럼 보인다. 정신 못 차릴 만큼 숨 가쁘게 달려가는 대신 차근차근 게임을 제시해 상황을 풀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단언컨대 일종의 착시다. <로그네이션>은 최근 트렌드에 충실하게 컷을 쪼개고 밀어붙인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1편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육체의 쇠락을 강렬하게 부정하는 톰 크루즈의 끈질긴 질주와 집착 덕분이다. 전반적으로 컷을 잘게 쪼개던 영화가 컷을 나누지 않고 가만히 관찰하는 순간이 있다. 톰 크루즈의 액션을 전시할 때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굳이 현란한 숏을 동원하지 않는 건 오직 이 대단한 스턴트를 좀더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 위함이다. 모로코의 발전소 등 대표적인 액션 시퀀스마다 이같은 느린 편집과 관찰, 혼신의 스턴트가 반복된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에단 헌트의 놀라운 능력이라기보다는 톰 크루즈의 무한도전에 가깝다. 한줌의 애잔함과 인물을 응원하는 마음은 차라리 여기서 나오는 것 같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2011)의 브래드 버드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내면에는 피해갈 수 없는 슬픔, 비슷한 것이 있다. 톰 크루즈는 스타덤의 계약조건을, 그가 누리는 것에 따르는 비용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역설적이지만 그 순간마다 영화의 우아함이 되살아나고 그래서 그때마다 되묻고 싶어진다. 이 영화의 우아함은 에단 헌트 덕분인가, 톰 크루즈 덕분인가. 애초에 에단 헌트의 첩보 활동은 무엇을 위함인가. 그에게 일말의 고뇌가 남아 있는가.
절대 지지 않을 갬블링이 주는 피로
에단 헌트의 고뇌는 사실 1편에서 마감되었다. 한때 <미션 임파서블>은 동료에게 배신당하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던져진 남자가 스스로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정당성에 대해 반문하는 이야기였다. 식상한 결말로 이어질지언정 그 시절 에단 헌트에겐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고뇌가 있었다. 그런데 2, 3, 4편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에단 헌트는 질문의 이유를 하나씩 상실한다. 동료, 지인, 아내 등 완벽하게 그의 약점이 되었던 일반인의 세계와 하나씩 연을 끊고, 믿을 만한 동료를 얻으며, 4편에서는 비로소 요원으로서의 자신을 완전히 긍정해버린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1편에서 집단의 타락과 배신을 경험한 에단 헌트는 스스로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할 책임을 떠안았고 홀로 완벽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독자적인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정밀 기계로 거듭났다. 이 지점에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응당 던졌어야 할 질문을 방기해버렸다. 더이상 고뇌하지 않는 첩보원은 통제 불가능의 시한폭탄과도 같지만 영화는 에단 헌트를, 아니 톰 크루즈를 끝까지 믿고 따른다. 시리즈가 톰 크루즈의 원맨쇼에 집착하는 사이 이 위험한 요원은 어느새 신의 반열에 올라서버린 것이다. 전지전능한 존재 앞에서 이제 영화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맹신뿐이다. 4편에서는 그나마 그의 고삐를 잡았던 브랜트마저 팀워크라는 미명하에 이번에는 감과 경험에 의존한 에단 헌트의 판단에 적극적으로 투항한다.
에단 헌트의 대척점에 있는 신디케이트의 수장 레인(숀 해리스)은 ‘무모한 갬블러’라는 평으로 헌트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낸다. 레인과 헌트는 거울상처럼 닮은 존재다. 두 사람을 세계 최고의 요원과 테러리스트로 가르는 건 그들의 존재가 서사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정도의 차이다. 임무의 정당성에 회의를 느낀 레인은 명령체계를 부수는 쪽을 선택했다. 하나 이미 명령체계 바깥에 있는 에단 헌트에게 그런 성찰 따윈 무의미하다. 에단 헌트는, 정확히 톰 크루즈는 옳고 그름의 바깥에서 첩보와 임무라는 갬블링을 반복한다. 그에게 필요한 건 세계평화가 아니라 자신의 전능을 증명할 수 있는 더 크고 화끈한 도박판이다. 지지 않는 게임판 안에서 즐거운 건 본인일까, 구경꾼일까. 에단 헌트가 경쾌하게 이 게임을 즐긴다는 인상을 받은 순간부터 시리즈의 가면이 벗겨진 기분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로그네이션>의 서사 얼개는 톰 크루즈의 액션을 효과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상황의 반복, 연쇄, 기계적 조립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런던의 레코드숍에서 헌트와 레인이 마주하는 첫 장면과 역전된 입장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마주하는 마지막 장면, 두점 사이를 그어놓은 선 위에 놓여 있다. 점과 점, 액션과 액션, 상황과 상황을 긴장과 이완의 연출을 통해 기술적으로 제법 유연하게 엮은, 에단 헌트의 사적 복수담이라 봐도 좋겠다. 다만 ‘톰 크루즈’가 강조될 때마다 ‘에단 헌트’라는 알맹이가 점점 사라져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중간 과정을 채우는 게 결국 에단 헌트가 꿈꾸는 대로 뭐든 이루어지는 전능하심을 반복하는 것뿐이라면, 이제 더 이상 ‘볼만한’ 속편이 나올 거란 상상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