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이는
장률이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는 환경과 풍속의 필연적 관계를 고려하여 인물들의 허구를 조성하는 감독이다. 다만 작업의 착수 과정을 되짚어보는 게 필요하겠다. 만약 이방인이라는 주제어가 아니라 다른 것이 주어졌더라면 장률이 다큐 연출에 눈을 돌렸을 가능성은 얼마나 됐을까. 장담할 수 없다. 장률은 이방인이 주제어로 제시되자 평소에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았던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렸고 그들의 삶을 잘 알지 못하므로 극보다는 다큐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이때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다름 아니라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최초의 사실이다.
모르기는 해도 장률은 중국에서 온 누군가를 네팔이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누군가보다는 훨씬 더 깊고 폭넓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충분한 제작 기간이 주어졌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풍경>의 등장인물 중에서라면 도축업에 종사하는 쉬첸밍과 같은 인물에 전적으로 매달려 그의 삶을 들여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률이 선택한 다큐의 방식은 지금과 같다. 지금과 같은 방식이라면 무엇인가. 되도록 한국에 거주하는 각 나라의 이주 노동자들을 고루 만나되 그들을 이방인이라는 추상적 공동체로 묶어서 보는 것이다. 장률은 그 추상적 공동체를 두루두루 보는 역할을 자처한다.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 알기를 포기한다. 대신에 바깥에 서 있는 견자(見者)가 된다. 그게 아마도 장률이 말하는 대상과 지켜야 할 중요한 거리인 것 같다.
그러므로 장률이 <풍경>에서 지키는 윤리적 자세가 있다면, 이미 알려진 것과 같은 대상들의 삶의 터전을 존중하는 따뜻함 이전에, <풍경>에 등장하는 대상들이 자신에게는 실상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 이미지에 해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솔직함에 있다. 이것은 그들의 삶을 잘 몰랐고 여전히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의 알려진 장률의 윤리와는 또 다른 것이다. 나는 그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이전에, 이방인이라고 할 때 저들이 내게는 이미지로 먼저 떠올랐다는 사실을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률에게 이주 노동자는, 처음부터 실체이고 주체였던 것이 아니라 스치고 영향받아 기억에 남은 풍경이자 이미지다. <풍경>은 그 풍경과 이미지를 비로소 보는 영화다.
그렇게 하여 인물이라는 대상의 노동 행위를 포함하여 그들 생활의 좁은 반경과 허름한 상태까지 풍경에 모두 포함된다. 인물이 일하는 일터와 휴식하는 집과 그 주변에 이리저리 널려 있는 사물들. 그 풍경은 때론 무심하게, 때론 정중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많이 말해졌지만 그래도 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인위적으로 조정된 것이 분명한 풍경 몇 가지를 잠깐 일별하는 게 좋겠다. 가령 마을의 나무에 묶여 있는 그네나 앞마당에 있는 자전거, 공장에 매달려 있는 선반 그리고 전철역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다.
이 장면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풍경인데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이는 풍경이라는 것이다. 흔들리는 그네, 흔들리는 선반, 움직이는 자전거,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장률의 인상적 개입이라는 범주 하나로 묶어내기란 벅차다. 차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에 묶인 아이의 그네와 공장 천장에 매달린 선반의 흔들림은 한 범주로 볼 수 있다. 그것들이 저 혼자 흔들거렸을 리 없으니 그 장면들이 연출되었음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 풍경을 통해 그 공간에 있었던 사람의 흔적을 느끼거나 그의 지나간 시간에 있었던 행위를 짐작한다. 하지만 앞마당에서 스르륵 움직여 앞으로 내딛는 자전거는 그와 다르다. 그 자전거는 숏이 시작할 때 이미 흔들거리고 있는 그네나 선반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프레임 인 되어 있는 상태에서 움직임이 전시되었으므로 여기엔 불가사의한 것의 개입이라는 표현적 욕구가 있다.
전철 장면에서는 비로소 현실의 풍경과 꿈의 풍경이 서로 교통하는 또 다른 논리가 형성된다. 저 멀리 전철역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이주 노동자는 전철이 지나가고 나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들은 왜 사라진 것일까. 우리의 대답은 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 장면의 위치와 그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들의 내용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제주도에 한번도 못 가봤는데도 아내와 제주도에 가는 꿈을 꾼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인터뷰는 “제주도에 가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 제주도 가고 싶어요”로 끝난다. 전철 장면이 그 뒤에 등장한다. 그때 그들은 사라진다. 그리고 뒤이어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카메라는 제주도에 와 있다. 장률이 그들을 사라지게 했고 소원 그대로 제주도에 데리고 온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에 갔던 카메라는 병든 스리랑카 여성 노동자, 달력 안의 풍경을 보고 사는 그녀의 현실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꿈과 현실과 소망을 오가는, 움직이는 풍경의 대표적인 사례다.
꿈, 하층 이방인들의 정서적 에피스테메
<풍경>은 꿈을 주요하게 다룬다, 그런데 그 꿈이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서의 꿈이 아니라 잠을 잘 때 꾸는 꿈이다, 라고 영화를 보기 전에 들었을 때 무척 궁금했다. 후자의 꿈은 그 얼마나 다양하게 불경한 내면과 불규칙한 외양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편의상 전자의 꿈과 후자의 꿈을 비전과 드림이라고 나눈다면, 이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영화가 그들에게 비전을 묻지 않고 드림에 관하여 물을 때 그건 어떤 식으로 표현될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가령 어느 남성 이주 노동자 한명의 꿈이 다음과 같다고 하자. 사장님의 아내가 자신의 고향집 아내로 둔갑해 있고 그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꿈에서는 사장님이라고 지칭되고는 있지만 실은 공장의 동료인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꿈이 한국에서 꾼 꿈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다고 말한다면? 혹시 이러한 불경하고 유치한 꿈에 대한 고백이 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고 여러 사람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진술된다면? <풍경>은 지금과 같은 영화가 되진 않았을 것 같다.
수위는 약하지만 실제로 이와 비슷한 꿈이 딱 한번 말해진다. 필리핀 출신의 한 여성이 들려주는 꿈 이야기다.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꿈에서 전통대로 신랑과 신부가 춤을 추어야 하는데도 자신만 “야한 춤”을 추고 있고 남편이 될 상대는 오히려 친구들을 데려와 그녀를 보라며 놀린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여성의 꿈은 실상 감독에게도 평자들에게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 꿈은 <풍경>에서 진술되는 꿈들 중 가장 불경하고 유치하거나 의뭉스러운 일상의 꿈다운 꿈에 속할 만하지만 그 때문에라도 가장 예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녀의 꿈을 이 영화 안에서 예외로 만들었을까. 그녀는 한눈에도 사무직 여성이고 인터뷰에 응한 대상들 중 가장 자신감이 넘쳐 보이며 현재의 행복감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꿈이 나머지 사람들의 꿈에 포괄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녀의 사회적 상태가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영화의 등장인물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결핍을 말하지 않는다.
이 예외를 근거 삼아 역으로 <풍경>에서 꿈이 하는 역할을 짚을 수 있다. 대다수는 가족, 그리움, 학대, 상처, 현실의 어두운 반복 등을 진술한다. 그에 얽힌 꿈들은 전문가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해독될 정도로 직접적인 결핍이나 소망의 반영이다. 결국 <풍경>은 간명한 드림들을 모아서 쉽게 풀리지 않는 저 깊고 어두운 비전을 가시화하고 있다. 여기에 다소 느슨한 인터뷰의 연속이라는 형식적 단점이 도사리고는 있지만, 거대한 집단적 꿈을 진술하자 그들이 놓였거나 놓인 사회적 상태와 조건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은 무시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풍경>은 꿈의 영화도, 꿈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단지 꿈을 경유할 뿐, 내용상으로 그 꿈들은 거의 고향과 그리움에 대한 제각각의 반복 진술이며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인 공동체의 집단 진술이다. <풍경>이 다수의 꿈을 매개로 하여, 그들의 삶과 앎의 기본적 조건 단위를 상기시키고 특정 집단에 형성된 무의식 체계의 기초나 질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라리 이렇게 부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풍경>은, 꿈을 매개로 하여, 한국에서 일하는 하층민적 이방인들의 정서적 에피스테메를 길어올리는 영화다.
거리, 숨가쁘게 달리다 멈춰 선 자리에
감독 자신도, <풍경>에 대해 경청할 만한 의견을 전하는 평자들도, 이 영화를 말하며 ‘거리’라는 말을 한번도 빼놓지 않고 쓰고 있다. 대상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에 대한 예민함이 이 영화에서 중요하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물리적 거리감만이 다는 아닐 것이다. 어느 한편의 다큐가 대상을 근접 촬영했다고 하여 거리감을 해소했다거나 멀리 떨어져 촬영했다고 하여 거리감을 확보했다고 말하는 건 무리가 따를 것 같다. 그런데 <풍경>에서 흥미로운 건 영화 스스로 세운 거리감 형성의 분위기를 자신도 모르게 혹은 의도적으로 깨나가는 장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때 그 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바로 사진관 장면과 라스트신이다.
사진관 장면은 영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장률은 그 사진관의 주인과 외양과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그곳에 카메라를 두었다고 한다. 거기에 어떤 이들이 찾아오는지 어떤 대화가 발생하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 간질병이 있어 치료를 받으러 온 연변의 소녀가 사진관에 들러 현상된 사진을 찾으려 할 때 친절하지만 조금 부담스럽기도 한 중년의 사진사가 과도하게 친근함을 베풀며 아이에게 묻는다. “너 꿈이 뭐야?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아이가 “경찰”이라고 말한다.
장률이 그토록 피했던 사건, 이방인에게 함부로 비전을 묻는 사건이 스스럼없이 발생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질문을 받은 사람이 성인이 아니라 소녀라는 점이, 그리고 아이의 대답이 즉각적이고 활기차다는 점이 이 장면을 넉넉하게 수용토록 한 것 같다. 이 장면은 심지어 귀엽고 유머러스하다. 나는 이렇게 어려운데, 저 사람은 참 잘도 묻는구나, 하고 재미있어하는 감독의 기색이 느껴진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실은 가장 불쾌한 것과 마주친 것이지만 역으로 영화에서 가장 활기차고 호기심 넘치는 장면이기도 하다. 순식간에 영화의 저 대상이, 사진사가, 자신과 소녀의 대화를 이용하여 자신과 카메라의 관계를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거리가 깨진 것이다.
다큐에도 배우가 존재한다. 이른바 다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사회적 배우(social actor)라고 부른다. 그 배우들은 양식적 퍼포먼스를 벌이지는 않지만 종종 자기의 존재 증명을 위한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예컨대 비전향 장기수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에서 할아버지들은 카메라 앞에서 더 강건하고 우렁차게 보이려고 애쓸 때가 있다. 이런 점에서 <풍경>의 사진관 장면의 특별함이 있다. <풍경>에서 장률은 거리를 중시한다. 거의 모든 인터뷰 대상자들은 사회적 배우로서의 활동을 제약받고 있다. 그들은 일정한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며 꿈을 말하거나 일을 할 뿐이다. 그런데 사진관 장면에서만큼은 인물들이 유일하게 사회적 배우로서 대활약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다. 덕분에 조절된 거리는 실패하고 흥미가 배가된다. 그래서 이 장면은 우연적으로 기입되었지만 드림과 비전에 관한 일종의 영화 속 우화로 여겨지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다큐에서는 매우 희귀한 예이지만, 카메라가 사회적 배우의 역할을 하는, 바로 라스트신이다. 열네명의 이방인들을 모두 만나고 갖가지 풍경을 모두 보고 현실과 꿈을 모두 오간 뒤에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카메라가 갑자기 뜀박질을 시작한다. 카메라는 점프 컷으로 시내 중심에서 허름한 골목길까지 뛰어다니며 여기저기의 공간을 도약하다 어느 골목길에서 멈춰 서서 하늘을 본다. 그때 비행기의 굉음이 들린다.
이 장면이 모종의 뜻을 담고 있기는 할 것이다. 적절한 논평들도 이미 제출되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느낌만 보태자면, 이 장면에는 군중을 지나칠 때의 불안감도 있고 뛰어서 생기는 힘겨움도 있고 다 뛰고 나서 해소되는 약간의 시원함도 있고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버거움 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대한 더 상세한 해명을 시도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연기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흥미롭다.
<풍경>의 카메라는 영화 속 첫 번째 인물을 만나기 위해 목공소로 걸어들어갈 때 마치 누군가의 발걸음을 대신하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서 그 안으로 갔다. 홍대에서 학생들에게 목공을 가르치는 노동자의 강의실에 걸려 있는 그림 앞으로 걸어갈 때에도, 도축장에서 일하는 중국 노동자의 일터로 가기 위해 시장을 걸을 때에도 카메라는 종종 그런 걸음을 걸었다. 그때 카메라는 마치 인칭을 얻은 견자의 걸음걸이 같았다.
이 견자의 카메라가 모든 임무를 마치고 거리를 한바탕 질주하고 난 다음 멈춰 섰을 때 그걸 두고 단지 감독의 시선이라고 정리하긴 어렵겠다. 이 순간 카메라는 정말 감독의 눈이기도 하고 영화를 끌어온 그 견자의 눈이기도 하며 혹은 그 눈으로 담아낸 인물들 중 누군가의 심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모호하게 마지막에 이르러 비인칭의 상태로서 남게 된 것 같다. 다만, 가끔 걸었고 주로는 지켜보았던 카메라가 마침내 숨가쁘게 달린 다음 멈춰 서서 영화를 끝맺을 때, 이것이 앞선 장면의 거리감들이 맺어놓은 느낌을 획기적으로 풀어헤치려는 마지막 메타 논평이자 강력한 기획의 장면이라는 것, 그것만큼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