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니 스콧의 투신자살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쓰겠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잠깐 놀라고 애도의 마음을 가졌을 뿐 곧 잊었다. 하지만 방향은 엉뚱한 순간에 휘었다.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전철을 타야 하고 그 전철을 타면 철교를 한번 건너야 한다. 내려다보니 흙탕물이었다. 토니 스콧이 뛰어내렸다는 LA 산페드로의 빈센트 토머스 다리 사진을 보고 생의 자의적 최후를 맞이하기에는 다소 황량하고 허름한 곳이 아닌가 생각했던 게 그 흙탕물 때문에 떠올랐다. 그는 왜 뛰어내렸을까, 나이 예순여덟살의 노인이 알려진 것처럼 불치의 뇌종양 때문에 낙담하여 그러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사랑 때문이었을까, 하고 밥 먹는 도중에 동료에게 말했다가 쓸데없이 군다고 면박만 당했다.
2.
2003년 8월경 <4인용 식탁> 개봉 즈음에 <씨네21>은 ‘영화 속 영화 밖 자살’에 대한 글들을 실었는데 그때 남재일 선배가 자살의 유형에 관하여 쓴 인상 깊었던 글이 생각나 다시 찾아 읽었다. 요약건대 고층에서 맨바닥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강물 위로 뛰어내리는 것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땅으로의 투신은 “더이상 할 말없다. 똑바로 쳐다봐라”이고 강으로의 투신은 “우리는 가요. 찾지 말아요”라고 한다.
3.
당사자는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는데 전세계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토니 스콧의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에 크나큰 감정적 슬픔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물리적 낙하라는 방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방식이 총이나 칼이나 질식이 아니라 투신일 때 그의 생전에 그의 영화가 성취해냈던, 그 당시에는 물론 영화적 쾌로 다가왔던 어떤 장면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는 사실 때문일 거다. 엉터리로 비유컨대 쑤웅 하고 날아가 쾅 하고 부딪히는 많은 액션들이 그의 영화에 있어왔기 때문일 거다. 그가 멜로드라마의 감독이었다면 나는 그의 죽음을 멜로적 서사로 상상했을까. 잘 모르겠다.
4.
<탑건>이라는 감성적 영화로, 거의 청춘멜로에 가까운 그 영화로 스타 감독이 되었지만 그가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뤘던 연출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할리우드에 토니 스콧보다 배우를 잘 연출하는 감독은 훨씬 많을 것이다. 토니 스콧 영화의 영화적 긴장감이나 흥분이란 대개 사람의 깊은 감정이 아니라 상황의 극단적 위중함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의 영화의 핵은 대개 그 긴박한 상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물론 초반기 토니 스콧에게 따라붙었던 말이 ‘MTV식 영화’였다는 걸 모르지 않고 어쩌면 <악마의 키스>와 같은 데뷔작이 그런 빌미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그의 영화의 매력은 뭔가 다른 성격의 단도직입적인 면모로 더 강화되었던 것 같다.
그의 영화들의 매력이 빚지고 있는 본령은 ‘광고’다. 단지 토니 스콧이 광고업계 종사자였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어떤 주요한 장면들을, 혹은 어떤 영화들은 통째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광고라는 매체의 목적은 분명하다. A라는 광고가 B라는 소비자에게 메시지를 던져 소비욕구를 끌어내야 거기 가치가 있다. 송신자가 있고 수신자가 있는 셈이다. 마치 토니 스콧은 A라는 상황의 위중함에 호소력을 실어서 B라는 관객인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던져 받아 안게 만들곤 했다.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최대한 명료하고 간결하고 강렬하게. 그의 초반기 영화들이 달콤한 여성 의류광고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면 후반기 영화들은 땀냄새 나는 스포츠 웨어 광고 같다는 인상을 준다. 단, 토니 스콧과 광고를 연결 지을 때 이건 흠이 아니다.
5.
그렇기 때문일까. 리들리 스콧은 영화 예술가에 가깝지만 토니 스콧은 끝까지 광고 예술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존중받는 최고의 영화 예술가들은 메시지가 잘 전달되기를 바라기보다 본인 스스로 만족스러운 표현을 찾으면 메시지의 해석은 남들에게 넘긴다. 리들리 스콧을 스타 감독으로 만든 <블레이드 러너>는 그 해석에 관한 한 영화사의 진기록으로 남을 정도로 가지각색이다. 반면에 토니 스콧이 애매한 해석의 창조자였던 적은 없다. 강력하고 명확한 호소가 그의 것이었다.
의외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중요할 수도 있다. 형이 거시적이고 철학적이었다면 동생은 미시적이고 물리적이었다. 토니 스콧이 한번도 에픽을 다루거나 SF를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무척 인상적이다. 에픽과 SF의 대가인 형과 늘 동고동락하는 그가 형이 다루는 장르를 다루지 않을 때 거기에는 얼마간의 거리감이 있지 않았나 짐작된다. 에픽을 다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역사를 다루어도 될 만하다는 자기 인식의 품에 대한 자신감이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인식 같은 것이 필요하다. SF지만 실은 거대 에픽인 <프로메테우스>는 심지어 인류의 외계 선조를 찾아 나선다는 프로젝트가 아니었던가. 한편 철학 개념의 일대 논쟁의 장이 되었던 기념비적 SF영화가 바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에이리언>이었다. 그에 반해 토니 스콧의 영화적 천성은 주로 어떤 한정되고 긴박한 상황들 혹은 강력한 물리적 속도감들과 연관되는 지점에서 힘을 발휘했다.
<크림슨 타이드>에서 부함장(덴젤 워싱턴)의 행위는 긴박하지만 명료하다. 그는 미사일 발사를 저지하기 위해 함장을 가둬야만 한다.
6.
2009년의 베스트 영화로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토니 스콧의 <펠햄 123>을 뽑았을 때 처음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당시에 토니 스콧의 영화라면 시효를 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해의 최고 영화로 뽑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단순한데 힘이 넘친다. 1년 뒤쯤 비슷한 상황이 한번 더 벌어졌다. 어느 날 허문영 선배가 사석에서 문득 한편의 영화를 추천해주었다. <언스토퍼블>이었다. 보기 전에는 반신반의했는데 보면서 걷잡을 수 없이 쑥 빠져들었다. 나는 흥분했다.
7.
<펠햄 123>과 유작 <언스토퍼블>이 토니 스콧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지는 않는다. <펠햄123>은 사실 영화 중·후반부까지 액션장면이 거의 없다. 대신 다른 장면이 흥분의 속도를 자아낸다. 그 장면이란 이런 것이다. <다이하드> 이후인 것 같은데 할리우드의 액션영화들에 유독 ‘무전기 대화 신’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들이 많아졌다. <다이하드>의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 형사와 흑인 형사가 무전기로 대화하는 저 유명한 장면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그와 같은 장면이 <펠햄 123>에서는 거의 액션화된다. 심지어 그걸 두고 ‘교신 액션’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전철 배차 담당자(덴젤 워싱턴)와 전철 한량을 납치한 납치범(존 트래볼타), 둘의 긴장감 넘치는 교신이 액션의 물리적 속도감과 무관하게 이 제한된 시간의 촉박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 교신을 액션이라고 할 때 오로지 이 액션만이 영화를 버티고 끌고 간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의 교차 편집은 실은 교신 편집이다.
토니 스콧 액션영화의 핵심부에 있는 주인공 들은 영화의 비행사, 군함의 함장, 자동차 레이서, 혹은 열차 탈취범, 혹은 열차 기관사로서 그 해당 기계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사실 늘 누군가, 혹은 본부와, 혹은 그 자신이 본부가 되어 교신을 나누는 사람이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교신이 급박한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경우들이 많다. 연락을 주고받는 그들은 적이든 친구든 될 수 있다. 토니 스콧의 무전기의 우정이 등장하는 혹은 무전기의 대결이 등장하는 이 영화들은 단순한데 특히 힘이 있다. 송신과 수신의 액션. 특히 <펠햄 123>이 그렇다.
8.
토니 스콧은 텍스트 안팎으로 송신과 수신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말을 정련하자면 감각을 코드화 혹은 부호화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앞서서 형과 아우의 영화 세계의 차이를 길게 설명했지만 짧게 다시 정리할 수도 있다. 리들리 스콧은 철학적 코드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반면에 토니 스콧은 감각적인 장면을 코드화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코드화한다는 건 메시지를 잘 던지기 위해서다. 그럼 어떤 메시지를 잘 던지려 하는가. 내용이 아니라 이 장면을 활동하게 하는 감각이라는 액션이다. 액션 감각을 명확하게 ‘장르적 부호화’하는 것이 토니 스콧의 장점이다.
<펠햄 123>과 <언스토퍼블>에서 우리는 그런 액션 부호들을 강력하게 건네받는다. 토니 스콧의 영화적 장점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현란한 편집인데 그 말을 이제는 유능한 송수신이라고 고쳐 쓰고 싶다. 그 교차는 사실 말이 교차이지 서로의 대응이며 서로의 송수신이기 때문이다. 교신과 도청이라는 송수신의 혼란성과 적법성을, 혹은 부적법성을 하나의 첩보 세계의 핵심으로 다룬 것이 토니 스콧의 뛰어난 첩보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아니었던가. 나는 토니 스콧의 이 방식이 영화의 절대 감각에 속하는 것이라 보지 않지만, 장르의 세계 안에서 충분히 즐길 만한 감각의 코드화의 좋은 예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그걸 즐겼으니까 그러하다. 여기에는 그러니까 하나의 명제밖에 없다. 내 액션의 부호를 받아주세요.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받아들였다. 결국 받아들이게 하는 것 그게 뛰어난 광고다.
9.
<언스토퍼블>의 이야기를 추가해야겠다. 위험물을 실은 열차가 기관사도 없이 혼자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고 있는 위급한 상황이 <언스토퍼블>이다. 여기에서는 이 위험한 기차가 강력한 송신자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멈추지 않으면 이 액션이 재앙이라는 것이다. 수신자도 분명하다. 그게 우리다. 좀처럼 멈춰지지 않는, 그러나 멈추지 않으면 안되는 절체절명의 이 기차는 차라리 너무 위험하여 우직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 영화는 그 우직한 재앙덩어리 기차와 싸워 승리해야 하는 우직한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직한 재앙덩어리라는 이상한 말은 기차가 정해진 길을 따라서만 달려야 하기 때문에 쓰인 것이다. 비행기와 자동차 추격 신과 다르게 기차의 전속력 질주가 주는 긴장감은 그것이 정해진 선을 따라 내달린다는 데 있다. 기차는 ‘탈선’하면 안되고 탈선하지 않고 달리는 그 단호한 움직임의 일관성 때문에 더 무시무시한 것이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누가 더 우직한가의 싸움이다.
중요한 건 이거다. 여기 이 기차는 영화사에서 종종 거론되는, 풍경을 보는 근대적 유람기구도, 사색의 속도를 즐기는 사유기구도 아닐뿐더러 미쳐 날뛰는 괴물이다. 거대한 위험이라는 감각적 메시지다. 이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전달되면 이 위험이 제 몫을 다하면 영화도 끝나야 한다. 그래서 기차가 멈추자 순식간에 영화가 끝나는 것이다. 어떤 광고는 끝내 물건을 팔아야 하고 그럼 된 거다. 그런데 나는 이 물건을 잘 샀다고 생각한다.
10.
앞서의 생각들은 토니 스콧의 영화 전반이 대체로 그렇게 인식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그의 영화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그러니 앞으로 누군가의 수신 내용은 그 또한 그의 것이리라.
11.
2012년 8월23일 오전에 떠도는 뉴스를 보니 토니 스콧이 투신하는 장면을 카메라로 담았다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자기의 카메라에 담긴 내용을 한 매체에 팔아넘기려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는 토니 스콧의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아니 토니 스콧의 죽음이라는 액션을 담은 그 강력한 메시지가 팔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물론이지만 카메라에 담긴 사람이 토니 스콧이 아닐 수도 있고 그걸 거래하려 했다는 일화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런데 토니 스콧의 가장 뛰어난 영화 중 한편인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를 보면 사건 현장에 있던 누군가의 카메라에 살인사건이 우연히 담기는 일이 벌어진다. 토니 스콧이라는 한 감독의 최후의 생이 누군가의 카메라 어딘가에 정말 그런 식으로 담기기라도 한 것이라면 뛰어내리는 그 순간 그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 모르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