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깬 레이(구로사키 기리카)에게 오빠 히로키(오다 신이치로)와 아버지(쓰루다 고조)는 “학교는?”이라고 묻는다. 레이는 “끝났다”라고 대답하며 겨울방학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방학은 학기와 학기 틈 사이에 자리한 시간이다. 또한 방학의 시작은 학기의 중단으로부터 기인하는, 말하자면 학교의 시간들을 일시정지하고 획득한 무좌표의 시간이다. 학교의 수업, 친구들, 등하굣길, 일상이라 믿었던 시간들이 잠시 멈추는 나날들. 그리고 학기 중의 시간을 통솔했을 시간표마저 제 몫을 다하고 만기되어 사라진다. 레이는 겨울방학을 맞이하면서, 일시정지된 시간 속에 머문다. 엄마는 할머니의 병간호로 집을 비우고 있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다. 레이는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운동하기를 멈춘 것 같은 따분한 세계 안으로 홀로 농구공을 튀기며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이방인이자 여행자인 규리(정주은)는 도쿄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그러나 규리 역시 바쁜 아버지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다. 심심함을 없애기 위해 도쿄의 풍경과 자신의 얼굴을 영상으로 남기며 혼잣말을 쉬지 않고 내뱉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과 주은의 대사처럼 나무 사이로 쨍 하고 퍼지는 햇빛뿐이다. 레이와 규리, 둘은 일시정지된 방학과 여행의 시간을 재생시킬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정답이 사라진 시간, 정답을 모르는 영화
한편으로, 방학은 정답을 맞혀야 하는 시험이 사라진 시간이기도 하다. 홀로 농구를 하며 심심한 하루를 보낸 레이가 밤에 한 행동이란, 영어 공부를 하며 ‘미래에 뭐가 되고 싶은지’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답을 찾아보려 하지만 쉽사리 찾아질 리 없다. 방학은 정답이 사라진 시간이다. 박석영 감독은 팀을 최소한으로 꾸려 <레이의 겨울방학>을 찍었다. 그는 정해진 시나리오가 없는 상황에서 레이와 규리의 순수한 시간들을 기록했다. 사전에 정교하게 계획된 대본이 부재하는 <레이의 겨울 방학>역시 정답을 모르는 영화였다.
레이와 규리는 공원의 농구코트에서 처음 만난다. 규리가 코트의 농구공을 발견하면서, 바닥에 닿았다가 금세 다시 튀어 오르는 농구공의 탄성으로 레이의 세계에 말을 걸면서 두 사람의 우정은 촉발되고, 정지됐던 세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의 우정을 이어주는 것은 서로가 주고받은 농구공과 서툰 영어다. 둘은 가지런히 정돈된 문법들이 사라진, 오답의 문장들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전술했듯, 방학이란 정답이 사라진 시간이다. 그들은 각자가 준비한 최대한의 영어를 서로에게 꺼내놓는다. 서로가 정답을 가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 나아가 상대방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친구가 필요함을 자각하면서, 둘은 서로의 시공간을 교환한다. 레이는 규리가 묵는 호텔을, 규리는 레이의 집을 방문한다. 바쁜 아버지를 둔 두딸들의 목소리가 삭막했던 공간을 채운다. 둘은 더 이상 혼잣말을 할 필요가 없다. 햇빛이 사라진 어두운 밤, 잠에 든 규리 앞에서 레이는 가마쿠라에 갈 계획을 세운다. 둘은 오지 않을 전화와 바쁜 아버지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활기를 되찾은 겨울방학, 운동성을 획득한 두 소녀는 그렇게 새로운 하루들을 공유하면서 가마쿠라의 바다로 향한다.
한 줌의 광원을 획득하는 여정
레이와 규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서 무엇을 목격할까. 둘의 한철 우정은 바다에서 완결되는 것일까. 박석영 감독에 따르면, 그 역시 결말을 모르는 채로 기차에 올랐다. 다큐멘터리의 제작 방식을 흡수한 <레이의 겨울방학>은 끊임없이 눈앞에서 재생되는 광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빛을 뿜어내는 광원을 열망하는 여정은 영화사의 오래된 흔적이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달나라 여행>(1902)를 통해 밤의 광원인 달에 닿고자 하는 인류의 염원을 실행한다. 이는 프레임 안에서 달을 촉각적으로 재현하면서 이룬 기념비적 야심이었다.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의 <돈>(1983).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이자 그가 남긴 최후의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감독은 구원받을 기회조차 스스로 파기한 이본(크리스티앙 파테이)이 자수하고 사라진 뒤에도, 군중이 같은 자리에 멈춰 서서 빈 공간의 빛을 응시하도록 했다. 마치 우리가 지켜봐야 하는 것은 손에 피를 묻힌 채 파멸의 길로 들어선 한 남자의 절망이 아니라, 이본이 어두운 그림자 대신 남기고 간 한 줄기의 빛인 것처럼 말이다. 허구적 다큐멘터리인 소여헨의 <공원>(2024)에서도 빛은 결정적인 시공간으로 작용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유학생 아스리와 하난은 대만의 타이난 공원에서 각자의 시를 낭송한다. 유학생이자 시인인 두 사람은 경비 초소에 불을 켜고, 허구적 라디오 방송국을 건립한다. 영화의 종반부, 그들이 만든 방송국의 빛을 좇아 찾아온 이민노동자들이 길게 줄지어 서서 차례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빛은 이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지지한다.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레이와 규리는 바닷가에 앉아서 계속해서 형태를 바꿔가며 반짝이는 윤슬을 말없이 바라본다. 부단히 움직이며 반짝이는 빛을 만들어내는 바다. <레이의 겨울방학>에서 빛은 영화적 야심도, 구원의 가능성도, 어둠의 반대말도 아니다. 영화는 두 사람이 수면 위의 빛 한 줌을 자신의 것으로 획득하기를 기다린다. 바다를 바라보던 레이가 규리에게 묻는다. “넌 미래에 뭐가 되고 싶어?” 규리가 대답한다. “모르겠어. 난 나의 미래를 기다려.” 장래 희망을 나열하며 답을 애써 찾으려 했던 레이는, 규리의 대답을 들은 후, “그것도 좋아. 나는 자유야”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시야 앞에서 바다가 멈춤 없이 빛을 내며 자유롭게 출렁이고 있다.
규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레이는 누워서 오리 인형을 다시 꺼내든다. 인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빛. 바다의 빛은 레이의 방으로, 작은 인형에게로 이동해 이제 소녀의 방을 밝힌다. 의아하게도 레이는 “재미있었어. 혼자여도”라고 혼잣말한다. 레이와 규리의 짧은 우정은 끝난 것일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둘의 우정은 제 몫의 빛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미래는 뭔가 돼야만 하는 확정적 순간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임을 서로에게 알려주면서 이미 완수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짧게 지속된 두 소녀의 우정을 관측하면서, 우리의 지난 우정을 회상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타인이 아닌 자신과의 영원한 우정을 쌓도록 유도한다. 레이는 자신의 품으로 들어온 작은 빛과 어떻게 지내게 될까. 분명한 것은, 그 빛은 오프닝숏에서 우리가 이미 목격했듯 다음날 아침, 레이의 얼굴 위로 내리쬐어 머물 것이다. 그렇게 광원을 소유한 레이에게 남은 겨울방학과 다가오는 미래는 더 이상 무료한 시간이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