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환기 감독의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은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진부하다는 걸 일깨운다. 김대중을 존경하든, 김대중을 증오하든 오랫동안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입장은 선입견으로 단단해져 불변의 것이 되었다. 어느 편이건 초기에 형성된 관점은 새롭게 다듬어지지 않고 굳어졌다. 존경도, 증오도 다 진부하다. <길위에 김대중>은 다큐멘터리의 근본을 지킴으로써 우리를 진부함에서 구해낸다. 그에 관한 팩트에서, 팩트의 구성에서 차곡차곡 그의 일대기를 역사에 포개놓는다. 팩트의 구성 다음엔 주석과 해석이 남는다. 그 단계에서 굳은 관점을 해체하고 새롭게 보기 위해 우리는 다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길위에 김대중>은 그 나침반이다.
민주주의자로서의 일관된 자기 정체성
김대중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연대기순으로 전개하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를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기초적인 전기적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그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인식 변화의 변곡점이 될 만한 순간들을 곧잘 제공한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내란음모로 사형선고를 받은 후 정권의 회유를 받아들여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김대중은 미국의 정·관계 인사와 언론을 접촉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회복을 열렬하게 호소했는데 그 당시 뉴스에 출연해 앵커와 인터뷰하는 자료 화면에서 반대편의 프레임 조정에 말려들지 않는 그의 노련하고 단단한 화술과 입장이 드러난다. 앵커가 묻는다. “김대중씨, 남한의 정부를 독재국가라고 표현하셨는데 비무장지대 건너편에 있는 북한과 비교해볼 때 한국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까?” 김대중이 답한다. “안보 문제는 우리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전쟁 중이었을 때 가장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 외에는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있었습니다.” (앵커가 질문으로 제지하려 한다.) “김대중씨….” (김대중이 손을 내저으며 답변을 이어 나간다.) “잠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때 우리는 지방자치가 있었고 독자적인 사법부와 국민의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평화 시기에서 우리 국민들은 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안보 문제가 어떻게 지금의 억압을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부유한 기업가였던 김대중이 자유당 시절 정치에 뛰어든 이후 낙선을 거듭하다가 4·19 혁명 이후 장면 수상에게 발탁되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와 정적 관계를 이루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을 때 그는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희생해야 한다는 박정희의 노선에 맞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민주주의자로서의 그의 신념은 공산주의로 매도당했고 이후 평생 그에게 따라붙었던 딱지는 ‘빨갱이’였다. 중소기업 육성에 기초한 대중경제론과 북한과의 연방통일제를 주장했던 김대중은 대기업 중심의 중화학공업 육성과 북한과의 적대적 공존노선을 폈던 박정희와 충돌했다. 민정 이양을 조건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는 약속을 어기고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했고 급기야 유신헌법 개헌을 통해 종신대통령제를 실행했다. 박정희가 대만의 총통제를 꾀한다고 미리 그의 의중을 간파하고 공격했던 김대중은 중앙정보부의 암살 기도를 겪었고 1970년대 유신정권 내내 가택연금 신세였다. 날개를 잃은 그에게 가해진 집요한 정치 선전은 그가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선전 공세와 더불어 호남을 고립시킨 지역주의는 그를 전라도의 빨갱이로 만들었다.
앞서 미국 방송의 인터뷰 자료 화면은 김대중에게 평생 따라다녔던 친북주의자라는 공세에 맞서 그가 얼마나 일관되게 민주주의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세우고 주장했으며 실천했는지를 짧은 인서트 화면으로 증명한다. 레드 콤플렉스와 지역주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김대중을 증오했지만 그들에게 포위된 것처럼 보였던 김대중은 다른 한편으로 언론의 양지에서는 부재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억압을 부정하고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박정희의 정치적 양자인 전두환이 서울의 봄을 맞아 정치적 반동을 꾀하고 있을 때 한신대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주장한 죄로 공산주의자로 몰린 민주화 세력을 대변해 목숨까지도 불사하겠다고 사자후를 토하는데 이는 그의 운명의 예시 같은 것이었다. 수차례 목숨을 앗길 위험에 처한 김대중을 구원한 것은 그를 지지하는 대중이었다. 박정희와 역사적 대결을 치렀던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대중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1985년 그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정보가 차단된 시절이었음에도 김포공항부터 서울 시내까지 그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인파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앞으로 벌어질 것에 대한 새로운 상상
그리고 광주가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선 민주화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민항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격변이 있었다. 김대중을 사형시키려다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킨 전두환 정권의 딜레마에는 광주 시민들의 저항이라는 트라우마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쉽사리 김대중을 죽일 수 없었다. 그랬다간 다시 5·18 민주화운동의 규모를 넘어서는 대규모 저항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김대중은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특히 광주가 자신을 살렸다고 생각했다. <길위에 김대중>의 클라이맥스는 정치적으로 해금된 김대중이 마침내 광주를 방문하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자발적인 환영 인파의 물결 속에서 김대중은 오열하는데 이 오열에는 약속을 어기는 김대중, 대통령병에 걸린 김대중, 대통령 후보 단일화 염원을 저버린 김대중이라는 한 위대한 정치인에 오점을 남긴 또 다른 도덕주의적 선전 비판의 뇌관을 건드릴 만한 무언가가 있다. 감독 민환기는 이 장면들에 어떤 문자적 주석을 남기는 대신 오로지 화면들만 보여준다. 빨갱이라는 낙인에 더해 거짓말을 서슴없이 했던 마키아벨리적 패권주의자라는 도덕적 낙인까지 찍혔던 이 위대한 정치인의 삶을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 반기득권에 있었던 시민들을 향한 헌신에 바쳤던,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을 더 큰 명분에 희생했던 자취에 강력한 정서적 긍정을 바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길위에 김대중>이 완강한 관점, 불변의 평가판을 지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는 부드럽게, 선동적이지 않고, 겸손하게,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팩트를 나열하면서 그것들이 종합되는 지점에 해석의 틀을 옮겨놓으려 한다. 물론 그게 쉽게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걸 감독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지금까지 벌어진 것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벌어질 것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요구한다.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삶에 기대어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 부재했던 가치의 의미를 되새긴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거기에 따르는 수많은 모순의 실행들과 회복력 말이다. 부재했던 가치이고 부재하는 가치이지만 앞으로는 존재할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이 다큐멘터리는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