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시>는 디즈니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100’이라는 숫자는 월트 디즈니의 탄생 100주년은 아니다(그는 1901년에 태어났다). 디즈니의 첫 애니메이션 커리어 100주년도 아니다(1919년에 처음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다). 그가 세운 첫 스튜디오도 아니다(‘래프 오 그램’(Laugh-O-Gram)이라는 스튜디오를 1921년에 만들었다). 미키마우스가 탄생한 100주년도 아니다(미키마우스는 1928년에 세상에 나왔다). 그렇다고 첫 장편애니메이션의 100주년도 아니다(<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1937년에 개봉했다). 그러니까 ‘디즈니’라는 말로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가 여럿 있는데, 인간 월트 디즈니와 그의 분신인 미키마우스,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100주년의 당사자가 아니다. 100주년은 ‘월트디즈니 컴퍼니’ 설립 100주년에 해당한다(처음부터 그 이름은 아니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디즈니 브러더스 스튜디오’였고, 1926년부터 1929년까지는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이후 1986년까지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이었다). 어쨌든 첫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액션을 결합한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였다.

1923년, 디즈니가 자기 이름을 내세워 스튜디오를 차렸다고 해서 그가 미국의 유일한, 또는 최초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창업자는 아니었다. 1919년에 <고양이 펠릭스>가 첫선을 보인 이래, 고만고만한 규모의 제작사들이 등장해서 고만고만한 수준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본격적으로 치고 나간 것은 플라이셔 스튜디오로, 기술적 혁신과 대담한 캐릭터를 내세우면서 시니컬하거나 뒤틀린 이야기 시리즈를 선보였다. 엄연히 디즈니는 후발 주자였다.

주목할 것은 1923년 무렵이라는 시기다. 할리우드를 기반으로 ‘영화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도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한 때다. 무엇보다 <위대한 개츠비>로 대변되는 바로 그 시대다. 1차대전 이후, 뉴욕 증시로 상징되는 미국 경제의 발흥에 따른 물질적 풍요로움, ‘아메리칸드림’이 실체 반, 거품 반으로 끓어오르는 가운데 드리워진 위선과 속물주의의 그림자. 당대 애니메이션은 이런 왁자지껄한 세태를 소란스러운 난장판 이야기로 풀어냈다. 디즈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이셔의 <베티 붑>만큼 우울하고 어둡지는 않았지만 디즈니의 캐릭터 또한 침을 뱉고, 주먹 감자를 날리면서 제법 거칠었다. 앨리스는 꽤나 영악한 소녀였고 미키마우스도 나름 난봉꾼의 기질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사람들, 특히 어른들이 애니메이션을 소비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퇴폐적이고, 폭력적이고, 그런 와중에 풍자와 해학이 있는 유쾌한 엔터테인먼트.

1929년 대공황은 개츠비의 저택에서 번쩍였던 불빛들을 일순간에 꺼버린 것만 같았다. 암흑의 대환란을 위로한 것은 채플린만은 아니었다. 위기는 디즈니를 위한 쇼타임이었다. <아기 돼지 삼형제>가 대표적이다. “못된 늑대 따위 무섭지 않아” (Who’s afraid of the Big Bad Wolf)라는 노래는 미국인들을 다독거리고 용기를 북돋웠다. 디즈니는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할 준비를 차근차근 밟아갔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만들기까지, 디즈니 스튜디오가 애니메이션에 일으킨 변화와 발전은 눈부셨다. 사운드의 도입에 가장 멋진 미학적 성취를 이루었고, 컬러필름에서도 발 빠른 행보를 보였으며, 멀티 플레인 카메라 시스템을 발명해 2차원 평면에 놀라운 3차원 입체감을 불어넣었다(사실 디즈니 100년의 역사, 아니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커리어에서 가장 눈부신 성취는 초반 20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키마우스는 그의 분신이 됐고, 20년대의 불량스러움에서 벗어나 30년대부터는 모범생 이미지로 바뀌기 시작한다(그러면서 미키마우스는 더이상 유머에는 젬병이 되고 말았다).

다시 처음으로. <위시>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보아라, 이것이 디즈니이니라!’라고 펼쳐 보이는 자축 무대다. 무엇을 어떻게? 100년의 세월을 톺아보며,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쓸 만한 것들을 모두 모아 한자리에 늘어놓을 거한 상차림. 차려낸 이야기는 이렇다.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의 왕국이 있는데, 모두의 존경을 받는 왕은 못된 꿍꿍이를 하고, 주인공 소녀는 용기를 내어 악을 물리치고 본래의 소망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렇다. 100년간 디즈니가 반복해온 이야기이고, 주제이며, 구성이다. 약간의 변주를 꼽자면 일단 왕자와 공주가 없고(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늘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건 아니다. 사실 절반도 안된다), 악역을 맡은 왕이 순도 100% 빌런은 아니며(그렇다고 실존적 고뇌가 넘치지는 않는다), 조력자로 ‘별’이라는 별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 정도. 이 정도면 100주년 잔치를 위한 무난한 설정처럼 보인다. 조금 더 짓궂게 굴자면, 소망의 마법 왕국은 디즈니 유니버스이고, 타락한 왕은 월트 디즈니라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렴 그럴 리가….

<위시>는 여지없이 디즈니의 DNA를 드러냈다. 물론 그들은 완고한 고집불통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다. 많은 비판을 받아오는 동안 조금씩 수정하고 보완하기는 했다(그런 변화를 보여준 다른 제작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은 도태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때론 어설프게 비판을 수용하고 반영하다 보니 부자연스러운 면도 있고, 어색한 제스처도 있기 마련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디즈니 DNA는 꿈(아메리칸드림)에 대한 변함없는 집착이다. “꿈은 소망이고, 소망은 희망이며, 희망은 도전해야 하며, 도전을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증. 디즈니가 100년 동안 해온 것은 꿈을 보여주고, 그것을 마법처럼 작품 속에서 구현하며, 관객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미션이었으며, 이는 곧 미국적인 가치의 비전이자 실천이며 증명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개츠비의 낭만적 이상이 처참하게 붕괴되고 난 후,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디즈니였다.

<위시>는 디즈니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하지만 그 방식과 전략, 태도가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킨다. 주인공을 제아무리 현재의 트렌드에 맞추려 해도 대학 입학 전형에나 적합할 모범적 ‘인재상’에 갇혀버린다. 리더십, 용기, 희망, 도전 등의 덕목은 진부한 자기 계발서에서나 어울릴 낱말들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사건의 전모를 회상하는 닉 캐러웨이가 ‘온 세상이 제복을 입고 마치 차렷 자세를 취하듯 도덕적으로 흐트러지지 않고 영원히 반듯하기를’ 바란 것과 일맥상통한다. 30년대의 미키마우스가 그러했고, 이후의 주인공들이 그러했으며, <위시>의 주인공이 지금 그러하고, 앞으로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그러할 것이다. 문제는 ‘가치’ 자체가 아니라, 제복 차림으로 차렷 자세를 취하듯 경직된 강박증과 결벽증으로 그 가치를 가르치려는 ‘태도’에 있다. ‘불행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요’가 경직되면 ‘너희가 불행한 건 희망을 갖지 않아서지’라는 도그마가 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메신저에 약간의 융통성을 반영한다 해도, 메시지를 앞세우려 급급하다 보니 작품은 도통 즐겁지가 않다. 이야기의 진행에 촘촘한 빌드업 대신 정해진 타임라인에 따라 뻔한 사건과 해프닝이 놓이고, 허술한 감정선은 뮤지컬 넘버로 채워넣으며 억지로 고양시키는 무리수로 가득하다. 정형화된 캐릭터의 동작과 표정은 ‘디즈니 스타일’이라는 시그니처 대신, 수십년간 연기력이 제자리인 한물간 배우의 진부함과 안일함으로 다가온다. 가장 새로운 캐릭터 설정인 ‘별’은 신선함보다는, 모든 갈등과 장애를 너무나 쉽게 풀어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버린다(AI로 시나리오를 쓸 때 주의할 것!).

그래, 어차피 <위시>는 100주년 파티 영상이다. 무엇보다 디즈니를 의심치 않는, 믿음 강한 이들을 위한 것이다. 찬양과 간증으로 가득한 가운데, <When You Wish Upon a Star>는 찬송가가 되었다. 어쩌면 앞으로의 디즈니는 자신들의 성 안에 갇혀 스스로 컬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성 밖에 남은 사람들은 이교도가 되어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