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 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해, 개인성과 역사성을 교차시키는 방식에 대해, 역경을 극복하는 내용에 대해, 인간의 본질을 통찰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 책을 온전히 느낄 기회를 박탈당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인간의 통제 욕구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근대인이 빠져 있는 줄도 잊고 빠져 있는 환상들이 있다. 교환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아득히 뛰어넘어 그 자체로 물신이 된 화폐라든지, 모든 것을 인간을- 혹은 자신을- 위해 진열된 상품으로 보는 시선 같은 것이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과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라는 달콤한 환상이 있다. 이 환상은 우리의 문명을 발전시키고 이끌어간다. 나는 나의 몸을 통제할 수 있어. 나는 나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어. 우리는 자연을 통제할 수 있어. 우리는 기술을, 인간의 미래를 통제할 수 있어.
그러한 환상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다가 상상하지 못했던 파멸적인 사건을 통해 문득 깨진다. 우리도 알고 있다.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계획은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휘청거린다. 코로나19는 예고도 없이 닥쳐왔고, 기후변화는 시시각각 심각해진다. 우리도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근대인이기에, 인간의 힘으로 문명을 일구고 자연을 자원으로 만들어온 이 행성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에 통제의 힘을 믿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몸이 건강을 거부해? 자연이 횡포를 부려? 나의 승리를 보여주겠어, 라고 다짐하며 자세를 잡는 어떤 정신.
그러한 정신이 인간의 사망률을 낮추고 건강을 증진시키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문명을 이끌어나가는 동안 우리는 양쪽 렌즈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 렌즈는 혼돈을 보는 능력이다.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는 것과, 모든 것을 끝까지 통제하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다르다. 혼돈과 우연을 인정하지 않으면 삶과 세상은 영원히 반쪽짜리로 남고 만다.
새해 첫머리, 거대한 통제에의 욕구가 넘쳐흐르는 속에서 나는 이상한 두려움을 느낀다. 통제의 환상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는 몸도, 마음도, 성취도, 부와 명예도 각자의 통제 실력에 대한 증명이 되고, 돼지 사이에 도는 구제역은 살처분- 대학살- 의 명분이 되며, 코로나19와 기후변화는 빨리 극복하고 지나가야 할 무엇이 된다. 하지만 그러한가? 정말로 그러한가? 나는 몇번이고 나에게 되물으면서, TV 프로그램의 카메라가 집요하게 촬영하는 동물의 새빨간 잘린 살을 바라본다. 책의 첫 장면, 물고기에 바늘로 이름을 꿰매는 과학자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