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책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검색해보지는 않지만 소셜 미디어에서 ‘책의 말들’과 ‘겨울서점’ 키워드를 팔로하는 정도의 성의는 보이고 있다. 어쨌든 책을 쓴 사람으로서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읽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저자로서 느끼는 바도 많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읽고 떠올리는 생각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니. 내가 드러내지 않은 감정까지도 읽어내는 독자들을 보면서 독자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좋은 말만 있는 건 아니라서 흠칫 놀랄 때도 있다. 그 내용이 이해할 수 있는 근거에 기반한 비판이거나 책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 때는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읽는다. 나를 당황시키는 건 그렇지 않을 때다. 매주 얼굴과 목소리를 드러내고 생각을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졌으니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젊은’, ‘여성’이라는 것을 안다.
유튜브 채널을 보지 않고 책부터 읽었거나 책만 읽은 독자들과는 달리 유튜브를 한번이라도 본 독자들은 나의 상을 머릿속에 그린 상태로 책을 읽게 된다. 말과 글은 본디 매우 다르고, <책의 말들>은 특히 유튜브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던 모습과 생각을 많이 담은 책이지만, 그럼에도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로 책을 ‘들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책은 피할 수 없이 한 가지 속성을 지니게 된다.
‘젊은 여성의 에세이.’
어떤 독자가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며 ‘니가’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았다. 그 표현을 읽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독자는 다른 작가도 같은 호칭으로 부를까. 이것은 순수하게 내가 나이와 얼굴을 드러낸 사람이기 때문에 듣게 되는 호칭이 아닐까. 작가로서 고민한 시간을 단숨에 뭉개는 나이의 함정이란 무엇일까. 이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나이와 얼굴을 드러낸 사람이기 때문에 하게 되는 고민임을 깨달았다. 이것 참 피곤한 일이네. 다른 작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할까. 이런 피곤한 무한반복.
다른 젊은 여성 작가들의 책에 달리는 코멘트와 읽지도 않은 독자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달리는 한개짜리 별점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아니 우리가, ‘작가’로서 마주하는, 온몸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한계를 보곤 한다. 삶에서 깊이 퍼올린 이야기가 피해의식이 되고 보편성의 결여가 되고 무게감의 부족이 되는 그 단단한 벽을.
감사하게도 책은 며칠 전 판매부수 만부를 막 넘어섰고, 다행스럽게도 소규모 북토크도 성공적으로 열었다(실은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쓸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작가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증언과,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애쓸 모든 시간과, 그렇게 넘어서게 될 벽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