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 같다.” 최근 영화, 드라마 업계를 강타하고 있는 뭇 배우들의 과거 학교 폭력(이하 학폭) 의혹에 대한 관계자들의 코멘트다. 캐스팅 과정에서 배우들의 평판을 조회하긴 하지만 생활기록부를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고 과거 행적을 검색하기에도 한계가 있으니, 사전에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모든 의혹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의혹의 양상을 보아도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출연 중이던 작품에서 하차하는 배우가 있는 반면, 제기된 의혹은 사실 무근이라며 법적 공방을 이어가겠다는 의사를 밝힌 배우도 있다. 그러나 영화, 드라마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모든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이미 개봉 일정이 잡힌 영화나 방영 중인 드라마의 경우 더더욱 난감한 상황이다.
문제가 제기된 이들의 출연을 즉각적으로 보류하거나 배역을 교체하고 촬영된 분량을 재편집하는 등 최근 학폭 논란에 시시각각으로 대처하는 제작진의 모습을 보며 몇년 전 문화예술계 성폭력 논란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영화들이 생각나는 한편, 프로덕션에 갑자기 불어닥친 리스크에 보다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무엇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할지 궁금한 독자라면 남선우 기자가 취재한 이번호 기획 기사 ‘의혹과 진실 사이, 피해는 커져간다’에 주목하길 바란다.
이번 기획 기사를 준비하며 <씨네21>은 2013년 이후 작성된 여러 종의 출연 계약서를 입수했다. 배우와 제작사가 맺는 계약, 배우가 매니지먼트사와 맺는 계약을 두루 검토했으나 귀책사유 항목에 학폭과 관련된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명의 배우에게 제기된 의혹이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명의 스탭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에게 부여된 귀책사유 항목이 ‘부적절한 행동’, ‘대중문화예술인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체의 행위’ 등 법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있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책임의 주체가 모호한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는 점도 문제다. 경찰 조사와 법정 공방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의혹이 제기된 배우와 그의 출연작으로부터 이미 등을 돌린 관객 또한 적지 않을 때, 피해를 입은 투자배급사와 제작사, 감독과 배우, 스탭들은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지 난감하다고 말한다.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커뮤니티의 발달로 인해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의혹과 폭로는 앞으로도 꾸준히 영화산업에 그늘을 드리울 가능성이 높다. 위기에 대응하는 시스템과 매뉴얼의 보완에 대해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