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세요. 들이쉬는 숨, 내쉬는 숨. 당신의 몸을 한곳씩 관찰해보세요. 지금 이 순간을 느껴보세요.’
요가를 다녀보았다면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질 말들이다. 명상에 관심이 있다면 더 친숙할 말들이고, ‘마음챙김’에 관심이 있다면 더더욱 친숙할 것이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외부의 요인들로부터 나를 지키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스트레스를 낮추는 이런 활동은 과거에는 종교적 수행 중 일부로 여겨졌고, 지금은 현대인의 자기 관리 방법으로 여겨진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제공하는 자극의 홍수 속에서 이런 집중의 시간은 더욱 필요해진 것 같기도 하다. 나 역시 꼭 명상이 아니더라도 운동을 하면서 고요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종의 께름칙함이 있다. 개인적인 실수나 상실에 대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필요하겠지만, 만약 그 내면의 갈등이 외부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내면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해소’하는 일은 어쩐지 한 발짝만 넘어가면 자기 계발의 조건이 될 것처럼 보인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자기 계발의 언어가 도랑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마음챙김’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거대 기업들의 의도가 수면 아래에서 찰랑거린다. 아무리 외부의 환경이 나빠지더라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마음은 세상을 바꿀 것인가, 나를 바꿀 것인가?
경영학 교수이자 불교 신자인 로널드 퍼서는 <마음챙김의 배신>을 통해 ‘마음챙김’ 명상이 종교와 과학 사이를 편의적으로 오가며 자본주의 논리에 봉사하는 세태를 비판한다. 분명히 이런 명상이 주는 좋은 효과들이 있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방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내면의 갈등을 유발하는 외부 환경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내면의 갈등을 끝없이 처리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처한다. 여기서 사태를 나쁘게 만드는 것은 이렇게 내면에 집중하면 더 성공할 것이라는, 그래서 외부 환경을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는 것이다. 그야말로 책의 부제처럼, ‘자본주의 영성’이다.
물론 그러한 내면의 고요를 유지함으로써 외부 환경을 바꿀 힘을 얻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가 더 성공해서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려면 명상의 목적이 행복 내지는 낙관이 아니라 내면의 고요 그 자체여야 할 테다. 혹은 스님들이 한 가지 화두를 정해두고 생각을 밀어붙이는 것처럼, 차라리 내면의 갈등에 더 깊이 침잠해볼 수도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처럼 내가 지금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해보고, 내가 나를 바꾸기 위한 단기적인 목표와 세상을 바꾸는 데에 일조하기 위한 장기적인 목표를 함께 세워볼 수도 있다.
평온과 분노 사이. 생계와 대의 사이. 빠른 변화와 느린 변화 사이. 그 사이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그 사이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 같다. 둘 중 하나로 미끄러지는 건 순식간이라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잊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