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바틀비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필사를 하고 나면 그걸 확인하는 절차가 있다는데도, 당신은 여기 직원이니 잠시 나를 대신해 우체국에 다녀와달라는데도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그는 오로지 사무실 한켠에 은신한 채 오로지 필사 업무만을 하다가, 결국은 그 업무마저도 중단하고, 변호사와 바틀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물론 그 새로운 국면 속에서도 바틀비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뭘 어쩌라는 건가? 허먼 멜빌의 <바틀비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은 생각한다. 아니, 다 안 하고 싶다고 말할 거면 회사를 왜 다닌단 말인가? 하지만 바틀비는 반복적이고 집요하게 우리의 이런 믿음을 건드림으로써, 우리가 합의하고 있는 사회적 약속이 말 그대로 ‘사회적 약속’임을, 즉 우리가 임의적으로 정한 규칙이고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기에 그는 불온한 인물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유의 계기를 열어젖힌다. 이제는 진부하게조차 느껴지는 이 생경함을 아직 지겨워하기엔 이르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상상해야만 한다면 첫 질문은 이것이다. 2020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표준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양태를 검토하고, 남길 것과 바꿀 것을 논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능력주의를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는 결혼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는 결혼 후에 하는 출산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는 소유물 혹은 투기물로서의 집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는 각종 식재료가 부족함 없이 진열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 목록은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마치 자연처럼 느끼는 영역을 ‘제2의 자연’이라고 부르는데, 이 목록은 그러한 영역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테면 우리의 뼛속까지 침투한 자본주의는 자연이 아니지만 우리는 마치 자연인 것처럼 느낀다. ‘제1의 자연’이 이미 상당 부분 인간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지만(2018년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야생동물의 83%를 멸종시켰고 지구상에 사는 포유류의 96%는 인간과 가축이다) 우리는 그것 역시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늘 변화와 확장이라는 선택지가 있다. 코로나19 이전의 삶이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망이 나오는 때에 그런 선택지는 필수가 될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삼거나 그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을 보면서, 화력발전소가 이 순간에도 차질없이 지어지고 유튜브에는 소고기를 찬양하는 영상이 수십, 수백개씩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낙태했거나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여성에게 퍼부어지는 비난을 보면서 바틀비의 대사를 괜히 따라해본다. 불안하고 불온한 질문들을 떠올려본다. 아니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