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교수인 지인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집에 가면 소파에 파묻혀 TV 보다가 잠들어요. 하루 종일 두뇌 노동에 시달리다보니 아무것도 생각 안 하는 시간이 너무 좋아요.”
소위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이들도 과로와 피로 탓에 ‘수동적 여가’ , 즉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휴식을 선호한다.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고대하지만 저녁 시간이 주어져도 삶은 텅 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저녁 시간을 어떤 삶으로 채우느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쉽게 피로해지면서 내게 주어진 저녁의 삶의 질 또한 떨어지고 있다. 몸은 무겁고 노안은 심해지고 목과 어깨는 뻐근해서 책 읽기도 쉽지가 않다. 그러다 최근 시도하게 된 것이 드라마 시청이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드라마를 기피해왔다. 전적으로 내 성격 탓이었다. 한회가 끝나고 다음 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릴 만큼 나에겐 인내심이 없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도입되면서 이 문제는 확실히 해결된 것 같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온갖 상념에 빠져 천장을 응시할지언정 저녁 시간을 공허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수동적 여가에 대한 저항감과 신체의 무기력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하게 된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드라마 시청을 시도해보자. 하지만 아무 드라마나 보지 말자. ‘예술성’ 있는 드라마를 보자. 사회와 역사와 인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비평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드라마를 보자. 인터넷을 검색하여 엄선한 드라마를 하나 보기 시작했다. 미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높은 비평적 찬사를 받았다는 작품이었다. 시청을 하면서 나는 감탄했다.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삶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실존적 부조리, 개인의 심리를 묘사하는 상황적 디테일들, 모든 점에서 탁월해.’
하지만 이러한 먹물 기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드라마에 푹 빠져버렸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위기에서 벗어나면 환호했고 싫어하는 캐릭터가 나오면 ‘아, 그만하고 빨리 화면 밖으로 사라져’라며 짜증을 냈다. 몇회를 연달아 새벽까지 시청하다가 아쉬움을 달래며 억지로 컴퓨터를 끄기 일쑤였다.
능동적 여가와 수동적 여가의 차이는 그리 분명하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재미와 감동, 캐릭터를 향한 감정이입은 분석과 사유를 수반하지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정서적 반응에 가까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반응 또한 결국 내 두뇌에서 나온 것이다. 뇌세포의 연결망이 드라마에 반응하면서 활성화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생각 없음과 생각 있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걸작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 걸작은, 생각의 노동과 나태 사이에서, 새로운 생각이 움트는 기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니 나는 소파에 푹 파묻힌 채, 오늘밤에도 드라마를 찾아 볼 것이다. 그 드라마가 걸작이라면 아마도 시청 전의 나와 시청 후의 나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럴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아니 바로 그 낮은 확률의 기적 때문에 나는 더욱 드라마에 매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