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화제는 이사할 때의 난감함으로 흘렀다. 이 난감함은 햄릿을 패러디 하자면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나 또한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박사 논문을 쓸 때 모은 자료들은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특히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녹음한 테이프들이 그렇다. 나는 그 테이프들을 마치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의 인격, 아니 영혼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한다. 그 테이프들을 버리면 그 사람들에게, 아니면 나에게 액운이라도 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럴 때 나는 지극히 비합리적인 사람이 된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사물에게 인격과 영혼을 부여하는 애니미즘 신봉자가 된다.
다들 버리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물건은 무엇보다 유품이었다. 이 난감함은 매우 보편적이어서 심지어 유품을 처리하는 비즈니스도 존재할 정도다. 하지만 유품의 난감함은 단순히 양 때문이 아니다. 한 친구는 아버지가 생전에 오랫동안 찾았던 물건을 돌아가신 후 우연히 발견했다. 그 물건은 내 친구에게 “아버지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그 물건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쓸모없는 그 친구만의 보물이 되었다.
사실 많은 유품이 그러하다. 망자에게 의미가 있기에, 그리고 그 망자가 산 자에게 의미가 있기에 유품은 의미를 띤다. 그러나 그 의미는 무의미와 한끗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망자가 생전에 수집한 싸구려 우표들과 생전에 읽은 낡은 책들이 산 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맞아, 그런 건 버릴 수 없지”라고 몇몇이 고개를 끄덕일 때, 한 친구는 “다 집착이야”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물을 통해서 사라진 과거와 사람을 기억하려 애쓴다. 우리의 마음은 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놓쳤는데 놓지 않았다는 환상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적어도 어떤 것은 영원하기를 남몰래 갈망한다. 그렇기에 무신론자가 때로는 유신론자처럼, 과학자가 때로는 미신주의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다 집착이라며 합리적 판관 노릇을 하던 그 친구도 고백했다. 그는 며칠 전 노모가 오랜 세월 사용한 나무 도마를 건네받았다. 그 도마는 수십년의 칼질에 깎이고 깎여 안쪽이 움푹 패었고 거의 구멍이 나기 직전이었다. 그 도마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뻔히 알지만 “잘 쓰겠습니다” 하고 받는 마음은 “다 집착이죠”라고 냉소하는 마음의 안쪽에 숨은 가장 애틋한 얼굴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