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홈 무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칙 1. 인간은 책임질 능력과 각오가 갖춰졌을 때에만 동물을 가족으로 들여야 한다. 노숙 생활을 막 벗어난 제임스(루크 트레더웨이)도 그 점을 명심해, 부상입은 길 고양이 밥(밥)을 치료한 다음 풀어준다. 그러나 앞의 원칙에 만약 예외가 있다면 동물쪽에서 한 인간을 반려할 의지를 적극 주장하는 경우일 것이다. 고양이 밥은 유일한 식량인 우유와 시리얼을 나눠먹는 도량과 종일 ‘직장’에도 동반할 수 있는 길거리 뮤지션 제임스야말로 최적의 반려인이라고 판단한다. <내 어깨 위 고양이, 밥>은 실질적 차원에서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삶을 개선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실화에 기초한 동물영화는 감동을 위해 얼마간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실제 밥과 제임스의 사진이 영화 스틸보다 더 할리우드스럽다.
12/27
약간의 두려움을 품고 샹탈 애커만 감독의 <노 홈 무비>(2015)를 보러갔다. <노 홈 무비>는 생명력이 다해가는 어머니와 감독 자신을 찍은 다큐멘터리이고, 애커만 감독은 영화를 완성하고 오래지 않아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앞의 죽음은 뒤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는 모종의 인과를 찾으려는 충동으로 관람을 망치지는 않을까? <노 홈 무비>의 주요 공간은 팔순의 나탈리아 애커만이 사는 벨기에 브뤼셀의 아파트 실내다. 감독은 집 안에서 움직이는 어머니 나탈리아의 모습과 부엌에서 나누는 모녀의 대화를 우두커니 세워둔 카메라로 찍었다. 부엌은 샹탈 애커만의 대표작 <잔느 딜망>(1976)에서도 영화를 차지한 장소이고 뒷날 감독은 이 영화를 가리켜 “어머니께 바치는 연서”라고 불렀다. 얇은 커튼을 통과해 집 안에 괴는 주택가의 소음과 여름 빛 안에서 모녀는 두서없이 추억을 되짚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억이 목숨과 함께 사위어갈수록 인물은 실루엣에 가까워진다. 감독은 노모가 미국에 사는 친지 집에 머물 때는 컴퓨터 스카이프 화면을 찍음으로써 간소한 투숏을 만들어낸다. “넌 왜 이걸 찍는 거냐?”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보여주려고.” 감독이 ‘마망’이라 부르는 어머니는 대양 건너편에서 전송되는 네모난 창 안에서 어린애처럼 흐뭇하게 웃는다. 촬영 날짜나 앞 장면에서 얼마가 지났는지 자막으로 명기하지 않는 <노 홈 무비>에서 시간은 양적으로 모호하고 질로 구분된다. 모녀가 같은 집 안에 머무는 시간, 떨어진 채 대화하는 시간, 영화제 등으로 세계 곳곳을 주유하느라 감독 혼자 먼 나라를 여행하는 시간이 있다. 이중 세 번째 종류의 시간은, 어떤 인물도 목소리도 나오지 않은 채 사막을 달리는 차창에서 (아마도 스마트폰으로) 찍은 트래블링 숏으로 함축된다. 영화 제목이 암시하듯 샹탈 애커만은 세상이 작다고 느끼는 유목민이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고 살아남은 어머니 나탈리아도 가슴 깊이 그렇다.
“어렸을 때 넌 정말 예뻤단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엉망이 돼 있었지만. 구두끈이 항상 풀려 있었지.” “구두끈은 요즘도 풀려 있는걸. 나도 예쁜 엄마가 학교에 올 때 자랑스러웠어.” 나이 든 모녀의 애정 표현에는 과장도 주저도 없다. 어머니는 감자 요리를 차려낸 딸을 보고 이런 것도 할 줄 아느냐고 감탄하고 “게다가 너는 남들이 모르는 걸 많이 알고 있잖니?”라고 자랑스러워 한다. “그렇게 날 보고 있으니 널 꼭 안아주고 싶구나”라고 스카이프 화면 속 딸에게 불현듯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후반 몸을 뜻대로 가누기 힘들 만큼 쇠약해진 어머니는 비로소 조심스레 끌어안아온 불안을 드러낸다. 샹탈이 자신에게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고 탄식하는 나탈리아에게, 감독의 동생은 반문한다. “언니가? 종일 쉬지 않고 떠드는데?” 어머니의 대답은 내게도 쓰라렸다.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내게 하나도 하지 않아. 그 애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들은 말하지 않아. 나는, 그게 알고 싶은데.” 한편 간병인은 샹탈과 대화를 시작하면 환자가 불안해하고 숟가락질이 더뎌진다고 관찰한다. 딸의 목소리를 갈망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극진히 사랑하는 이와의 대화가 또 한번 가져다줄 실망의 예감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언젠가 내 어머니와 이별하게 되면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이 몹시 힘겨워질 거란 사실을 알았다.
<노 홈 무비>의 말미에는, 샹탈 애커만 감독이 또다시 여행을 준비하며 베란다에서 핸드폰 통화를 하는 동안 퍼뜩 잠에서 깨어난 어머니가 “샹탈은 어디 있니?”라고 중얼거리는 광경이 찍혀 있다. 거실 입구에 켜둔 카메라가, 근경의 소파에 누워 있는 어머니와 커튼 뒤에 어른대는 딸을 한꺼번에 촬영한 숏이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연출이다. <노 홈 무비>는 소위 ‘홈 무비’라면 편집됐을 시공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는 영화다. 비단 프레임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와 대화뿐 아니라 카메라도 숏과, 숏 안의 피사체 사이의 서열에 아무 관심이 없다. 카메라는 그냥 한자리에 서 있을뿐더러 서 있는 장소도 애초에 아름답거나 경제적인 구도에 무심하다. 심지어 전원 코드가 화각에 걸려도 치우지 않은 숏도 눈에 띈다. 내러티브도 구도도 그 밖의 어떤 인위도 부재하는 <노 홈 무비>는 급기야 영화가 저절로 스스로를 창조하는 기적을 목격하고 있다는 감흥을 준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숏에서 샹탈 애커만이 침대에서 홀로 일어나 창밖을 보고 구두끈을 묶은 다음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릴 때 우리는 거기 없는 나탈리아를 본다. 그리고 어머니도 딸도 없는 거실 벽을 향한 마지막 숏에는 나탈리아와 샹탈, 지금까지 우리가 본 ‘홈 무비’와 보지 못한 모녀의 시간이 모두 존재한다.
01/03
<녹터널 애니멀스>의 오프닝은, 모자, 부츠만 입은 나체로 살을 출렁이며 춤추는 XXL 장년 여성들의 고속촬영 몽타주다. 오늘날 주류 스크린에서는 보기 힘든 종류의 육체가 시야를 채운다. 처음에 그로테스크해 보였던 장면이 지속되면서 우리는 여인들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그들은 진심으로 즐기고 있으며 본인의 몸에 스스럼이 없다. 육체와 아름다움의 표준을 못 박고 거기에 모자라거나 넘치는 부분을 혐오하는 문화의 억압으로부터 그녀들은 자유로워 보인다. 도입부가 끝나고 앵글이 넓어지면 우리는 방금 본 춤이 현대 미술 갤러리의 이벤트- 또는 퍼포먼스 아트- 였음을 알게 된다. 여인들의 무대는 완벽하게 다듬은 늘씬한 육체를 디자이너 드레스로 감싼 부유한 관람객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이 아이로니컬한 풍경 가운데에 영화의 주인공인 갤러리 관장 수잔(에이미 애덤스)이 있다. <녹터널 애니멀스>가 서서히 드러내는, 수잔의 숨 막히게 세련된 삶은 오프닝 속 여인들의 출렁이는 몸, 희열에 찬 표정과 상극이다. 세겹으로 구성된 <녹터널 애니멀스>의 이야기 중 수잔이 주도하는 영화의 액자 서사 역시 부르주아 생활방식의 불모성을 자성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빈틈없는 패션, 대리석과 콘크리트로 지어올린 저택은 비판을 위해 거기 있는가? 도입부에 비쳐진 비만한 육체들은, 예술 오브제의 자리를 벗어나서도 <녹터널 애니멀스>의 리얼 월드 안에 포함된 가능성이 있을까? 톰 포드 감독은 오스틴 라이트의 소설 <토니와 수잔>을 각색하며 수잔의 직업을 시간강사에서 미술관장으로 바꾸고 그녀가 양육을 도맡는 어린 삼남매를 따로 사는 외동딸로 교체했다. 영화의 러닝타임 중 상당 부분은 어느 날 배달된 전 남편의 미출간 소설을 고급 저택의 곳곳에서 홀로 읽는 에이미 애덤스의 리액션으로 채워진다. 이 설정과 미장센의 변화는 영화의 큰 화두인 글쓰기와 저자, 독서와 독자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 특정한 문화와 취향을 가진 인물들의 밀폐된 세계를 그린 전작 <싱글맨>과 달리 계급 차이를 갈등 요소로 끌어들인 두 번째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는 아름다움에 관해 톰 포드가 직면한 딜레마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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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장군은 잊어라
마이클 섀넌은 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나 호아킨 피닉스 과의 배우다. 미남이 아니면서 눈에 띄는 외모를 가졌다.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이 용이하지 않아 보이는 이들은 어떤 역을 맡아도 미스캐스팅 아닐까 하는 우려를 부른다. 단,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맨 오브 스틸>로 메이저 상업영화의 악역 코스로 접어드는가 싶던 섀넌은 2016년 단짝 제프 니콜스 감독의 <러빙>의 저널리스트 역과 <라스트 홈>의 냉혈 부동산 브로커로 연기 폭을 입증했다.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섀넌이 연기하는 경찰 바비는 고독과 지병에도 불구하고 자기 연민과는 담을 쌓은 인간이다. 낭비할 시간도 없고 연연할 것도 없는 이 남자는 기침과 구토로 잠깐 멈출 때를 제외하면 표적을 향해 직진한다. 그는 <녹터널 애니멀스>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원작을 뛰어넘어 꿈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