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 다이어트가 화제에 올라 몇 킬로그램을 빼야 하느니 마느니 시끄럽기에, 내가 대뜸 ‘숫자의 노예가 되면 안 된다’고 뜬구름 잡자 모인 이들은 모두 키득댔다. 그날 ‘숫자의 노예’라는 말은 내가 미는 유행어였는데, 광화문에 사람이 얼마나 모인 게 뭣이 중헌디, 결과가 보여야 의미가 있지, 몇명 모였는지에 얽매이면 안 된다, 숫자의 노예가 되면 안 된다, 라며 남발하자 모두 슬그머니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난 농담이 아니었다. 사상 초유의 인파가 모였지만 평화집회라. 무슨 축제도 아니고. 내 나라 망해가서 내가 할 말 하겠다는데 왜 ‘평화’가 전제조건이 돼야 하는가? 마치 남녀관계에서 망나니짓하는 상대에게 할 말 못하고 참고 참다가 마지막 순간마저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눈도 못 쳐다보고 ‘그건 정말 고쳐줬으면 좋겠어’라고 속삭이는 팔푼이와 뭐가 다른가. 그러니 ‘버려진 쓰레기도 없고 이렇게 착하네~’라는 언론보도가 어른이 아이에게 하는 칭찬처럼 들려 속이 쓰릴 수밖에.
내 기억에 촛불집회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 추모의 형식으로 시작했다. 그때는 촛불 이외에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그들의 죽음이 뼈아파 견딜 수가 없었지만 미군은 우리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라는 암묵적 합의 또한 동시에 존재했다. 그래, 그야말로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우리의 의지를 표현하는 최대치가 그 촛불이었던 거다. 그때의 촛불은 위로였다.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와 또 다른 우리를 위로하는 행위. 그리고 촛불이 다시 유의미하게 등장한 것은 그 2002년에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 때였다. 같은 촛불이었지만 좀 다른 의미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지켜주지 못해 갖는 후회와 누군가에 대한 분노.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 누군가의 정권에서 촛불은 자주 등장했다. 차벽이 등장했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이 화제가 된 것도 그때다. 말이 많던 시기였다. 선동이라 했고 유모차가 나왔었다. 추모에서 저항까지 촛불이 담고 있는 함의는 시간이 가면서 점차 변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 하나는 촛불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촛불의 끝에서 확인한 것은 체념이었다. 촛불은 더이상 이슈를 만들지 못한다, 촛불이 의미를 갖지 못하면서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또 다른 길들이기 아닌가, 라는 위기감이 내 입에서 숫자의 노예라는 말까지 나오게 한 거였다.
그리고 지난 12월9일, 탄핵이 가결됐다. 난 한참을 생각했다. 이건 촛불이 힘을 발휘한 첫 번째 사건이다. 숫자의 노예였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만큼의 숫자가 국회의원을 움직인 것이 사실이니까. 큰 숫자에 큰 목소리가 실리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학습 때문에 체념해버린 내가 상식보다는 비상식을 믿고 있었던 걸까. 비상식적 프로세스로 황당한 결말을 주곤 했던 정치권에 익숙해져 내가 길들여졌던 걸까.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상식의 감각이라 난 이 사건에 혁명이란 단어가 단연코 명명되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어 치킨집을 검색했다. 혁명의 시작을 자축하기 위해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