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광화문에 다녀왔다. 국민들이라면 누군들 그렇지 않겠나, 가만히 있으면 화병이 날 것 같았다. 족히 30만명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촛불 행렬이 서울 중심가에 성난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인도에서 구경하던 시민들은 격려의 박수를 쳤고, 자동차들은 경적을 울려대며 응원했다. 어린아이부터 머리 희끗한 노인까지 ‘물러가라!’를 외치며 주권자의 존엄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축제같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혁명 같다며 함성을 질렀다. 분노와 울분이 파도처럼 도시를 덮친 밤. 아마 이번 주말에는 쓰나미가 될 것이다.
대통령 지지율은 헌정 사상 최저치인 5%로 추락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들마저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시민들은 밤마다 전국 도처에서 분노를 밝히고 있다. 비선출세력이 대통령을 허수아비 삼아 헌정을 파괴한, 이른바 무혈 ‘쿠데타’다. 대통령 뒤에서 복화술로 국가의 언어를 농단하고, 문화와 스포츠, 심지어 안보에까지 비선세력이 등에처럼 다닥다닥 들러붙어 뱃속을 채우고 있었다. 국민들이 세월호와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 앞에 슬픔과 우울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비선세력은 청와대를 부패의 거점 삼아 호주머니를 채우는 데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삥’을 뜯겼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가장 노골적인 공범일 뿐이다. 법인세 인하만으로도 매년 수 조원씩 혜택을 받던 재벌들은 박근혜-최순실 재단에 조공을 바치는 대신 더 큰 이익을 약속받았다. 재단 통장에 입금이 되자마자 박근혜 정부는 약속대로 경제활성화 법안, 노동개혁 법안, 의료 민영화를 비롯한 서비스발전법 등의 추진을 독려했다. 그야말로 부당거래의 잔치판, 서민들 등골을 흡혈한 등에들의 한탕 파티였다. 그사이 서민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뿐만 아니라 이제 와 난파선 쥐떼처럼 박근혜호에서 허겁지겁 뛰어내리고 있는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과 검찰 역시 이 잔치판의 공범들에 불과하다. 이토록 광범위하게 국가기관에 관여한 실세를 몰랐다는 것도 철면피의 오리발이거니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제대로 문장 하나 구사할 줄 모르는 허깨비를 불러들여 굿판을 벌이는 바람에 이 파국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느끼는 허탈감은 단지 대통령 퇴진이나 야당의 정권교체로 잠재울 수 없는 아우성일 것이다. 우주의 기운을 받아도 해소되지 않는, 체계의 임계점을 초과하는 거대한 분노일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 시원적 갈망, 지배계급에 대한 진저리와 울분, 공동체 운명에 대한 불안과 현기증. 어쩌면 직선제 개헌이라는 카드만 쥐고 불완전하게 출발했던 87년 체제의 종말이 다가온 것이리라. 87년 체제를 넘어 실재의 민주주의로 도약할지, 아니면 또다시 어설프게 봉인될지 그 시대사적 운명의 초침이 째깍거리고 있다. 이 파국의 폐허 위에 다른 세계를 새로이 증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커다란 함성을, 더 많은 민주주의를, 더 많은 자유를 거리거리마다 쏟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