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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서관
2001-02-15

문정숙이라고 영화배우 있지요? 그 언니가 문정복이라고 유명한 배우였는데, 북으로 갔어요. 문정복에 반해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평범하게 소년기에 시작됐다 했다. 소년 영화팬의 스타숭배는 언젠가 영화 자체에 관한 관심으로 심화됐을 것이고, 언젠가 ‘영화사료’가 될 영화자료와 ‘증언’이 될 영화인들의 인터뷰 테이프로 전환됐을 것이다. 배우 문정복 이야기는 이영일 선생이 한국영화사 강의 동안 처음으로, 또 마지막으로 제공한 ‘쉬어가는 페이지’였다고 기억한다. 그나마 그는, 학생 여러분도 영화를 보거든 개인적 감상일지라도 반드시 기억을 남겨라, 그것이 훗날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라는 말로 휴식을 마무리하고 강의를 계속했었다.

최초의 한국영화통사라 할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의 밑바탕에는 그런 소박하고, 근본적인 애정이 깔려 있었다. 해석과 재해석의 대상이 되어야 할 영화들이 사라지고, 초창기 영화의 제작, 상영, 관람의 경험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영화사를 쓰려면 두 가지 과정을 통합해야 했다. 묵은 자료들을 뒤지기,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온 영화인들의 기억을 증발하기 전에 고정해두기. 아프리카에서는 노인 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이라고, 누군가는 말했었다. 그의 기억 속에 자기네 역사와 문화가 저장돼 있다는 말이다. 이영일은 옛 자료들과 함께 그 ‘노인’들의 기억을, 언젠가 폐쇄될 도서관들을 한국영화사의 자산으로 공유하고자 했다. 그의 인터뷰 테이프에 목소리를 남기고, 노인들은 떠났다. 이영일의 테이프들이 고고학적 연구의 자료로 남은 건 그래서 다행이다.

생전의 그는 그 많은 목소리들을 불러내 글로 정리하고, 오랫동안 교과서 노릇을 해온 자신의 주저 <한국영화전사>를 새로운 발견과 해석으로 보강해 다시 쓰고자 했다. 그러나 젊은 영화연구자들의 ‘자원봉사’만으로 완수하기엔 버거운 일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다행히 그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는데, 그는 결실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떠났다.

한국영화들이 미국과 유럽,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그곳 평단의 말마따나 뒤늦게 발견되는 ‘해외진출 원년’에, 한국영화가 먼바다를 향해 돛을 부풀리는 이 시점에, 그 영화사는 자신의 시원을 향한 항해를 채근하고 있다. 이영일 테이프에 담긴 도서관들의 부활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