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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를 배우자고?
2001-02-05

편집자

<트레인스포팅>으로 상종가를 치던 시절, 대니 보일은 켄 로치의 시대는 갔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대처 시절, 영국에서 양심의 소리 역할을 해온 그 감독에겐 자기들을 설득하거나, 사로잡을 어휘나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대니 보일에게서 형식주의자, 스타일만 번쩍거리는 스타일리스트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한 나라안에서도 지역차이를 고스란히 빈부격차로 떠안은 스코틀랜드의 젊은이들의 끝모를 방황과 추락을 재현하는 그 영화에 매력을 느낀 축에 들었다. 어디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출입하는 화장실의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 따위의 낙서, 뜻없는 질주에서도 쾌락을 낚지 못한 채 황량한 하늘을 이고 이곳은 스코틀랜드(어쩔 수 없는, 저주받은 땅)라던 이들의 자조에 가끔씩 감전되곤 했다. 켄 로치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저 사람이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런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할리우드로 이적한 뒤, 완전히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선 인간에 대한 애정, 정의에 대한 열정이라는 `구시대'의 아직도 값진 유산을 재생해낼 의지가 읽히지 않았다. 그가 문제삼았던 건 켄 로치의 발언방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는 오해가 생긴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먹히지 않아. 소외된 이웃, 분단문제, 패배한 사람들, 환경, 구원…, 부지불식간에 기피목록에 오른 말들인데, 텔레비전은 그것보다 상품성 높은 연예프로그램의 편성비율을 늘려간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집들과 가구들은 날로 `세련'되어 간다. 주인공들이 설사 비탄에 빠져 있더라도, 배경은 우아해야한다는 약속이라도 한듯하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오해가 씻겨나가는 순간이 온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런 역할을 하던 지난 해, 영국의 극장을 휩쓸고 딴나라 평단의 호평을 얻은 <빌리 엘리어트>도 비슷한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대처시대 영국 탄광촌의 발레 천재가 춤에 이끌려 성장하는 길을 따르다보면 곳곳에서 사람살이의 여러 측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모범사례로 떠받들리는 대처 시대 노동자들의 삶이 거기 있는데, 가난한 노동자 아들의 성장기는 그 아버지들의 생존을 성공신화의 보조장치로 소비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배울 것'은 대처만이 아니지.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나서, 울고 난 눈이 부끄러워 사람들을 외면하고 거리에 나서며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