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전승민의 클로징] 시대유감 2026

부디 비웃지 말아주시길. 지난 주말에 ‘영크크’라는 표현을 배웠다. ‘영크크’는 K팝 그룹 코르티스(CORTIS)가 지난봄에 발매한 곡 <YOUNGCREATORCREW>의 제목을 한글로 축약한 말로 최신 트렌드의 감각을 향유하는 젊은이를 말한다. 반대말은 ‘늙크크’ 또는 ‘올크크’(올드제너레이션)다. ‘영크크’의 외연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이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할 순 없다. 나는 여전히 그 화용론과 문화의 맥락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각종 신조어 앞에서 당황해하며 소외감을 느끼는 나는 이제 더이상 ‘요즘 젊은이’가 아니다.

물론, 기성세대의 문화에 반발하며 ‘나’만의 개성을 주장하는 ‘영크크’들은 언제나 있었다. 서태지의 <시대유감>(1996), 젝스키스의 <학원별곡>(1997) 그리고 “처음 만나는 자유, 스무살의 011, TTL”(1999)까지(그렇다. 나의 ‘연식’은 이 정도다). 그런데 나는 왜 유독 2026년의 ‘영크크’가 어려울까? 그건 단지 내가 더는 10대나 20대가 아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잘파세대의 아날로그 지향이 보여주듯 어떤 문화가 향유 주체의 당사자성을 포함하지 않는다 해도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다. 나도 산울림과 동물원의 곡을 즐겨 듣는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80년대 미국 뉴웨이브다.‘그 시절’과 요즘 ‘영크크’의 차이는 주장의 내용이 아닌 화법에 있다. 이전의 젊은 세대는 불화와 비판, 반목의 태도를 기성 문화와의 연결 안에서 펼쳤다. 반면, MZ 감성의 핵심은 그 어떤 과거와 미래, 즉 ‘내’가 점유한 현재 이외의 역사성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기성의 문화와 제도에 저항하지 않는다. ‘영크크’에게 ‘올크크’는 사실상 세계에서 제외되어 보이지 않는 대상에 가깝다. 더는 집단적인 ‘청년’ 문화가 아닌 1인 소비자로서 실천하는 하나의 ‘트렌드’로서 ‘요즘’ 문화는 자족적인 세계를 추구한다. ‘나이’는 여전히 상관없다지만 지금의 취향 공동체는 하나의 연대체가 아니라 언제든 파편화될 수 있는, 계보 없는 임시 조직에 가깝다.

이러한 자기 완결성은 마크 피셔가 인용하는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의 ‘느린 취소’-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능력을 천천히 잃어감으로써 끝내 미래를 상실하게 되는 상태- 처럼 읽힌다. 이전 세대와의 저항이 관찰되지 않는 것은 청년 주체가 정말로 자유로워져서가 아니라 세대적인 서사를 조직할 수 있는 감각과 역량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자기 완결성은 무비판성으로 이어지고 ‘나’를 요철 없는 매끈함으로 구성함으로써 결핍과 상실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예컨대 ‘갓생’을 추구하는 자아는 고유한 인격이라기보다 스타일과 시스템에 최적화되는 사용자다. 뉴진스가 보여주는 무해하고 투명한 청량감은 복고의 동시대적 재해석이 아닌 과거의 질감을 걷어내고 고해상도로 복원한 시각적 표면에 가깝다. 릴스와 쇼츠의 무한 스크롤링은 과거와 미래가 없는 영원 속에 있으며, 인스타그램의 그리드는 삶을 언제든 임의적으로 편집이 가능한 스냅숏으로 대우한다.

당연히, 나 역시 이러한 무시간성의 현재 안에 결박되어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나는 연결을 원한다. 우리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테판야끼 on my Mac”을 이해하지 못해도, 왜 ‘야르’가 감탄사의 일종이 되는지 몰라도 그 말을 ‘당신’이 즐겁게 사용한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 서로 다른 세대가 손을 잡고 춤출 수 있다면 어떤 난관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은 그저 ‘늙크크’의 치기 어린 욕심일 뿐일까? 하지만 동시대가 유혹하는 자족성의 세계는 내게 폐소공포를 유발할 뿐이다. …<DOC와 춤을>을 유튜브에서 검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