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인연이다. 요즘 입에 달고 사는 말 중 하나다. 수많은 영화 중에 어떤 영화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만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영화기자의 업이라는 건 그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쪽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간지의 타이밍을 빗나가는 영화들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미쟝센단편영화제, 추석 합본 특대호 연휴 등 예정된 경로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폭풍 같은 영화들이 이미 지나가버렸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화제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니 믿을 수 없다. 명백한 직무유기다. 일본 애니메이션 <체인소 맨: 레제편>을 이렇게 흘려보내다니 분하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은 아무리 다뤄도 모자라다. 더 큰 맥락에서 조감도를 그려봤어야 했다. 태풍이 지나가고, 돌아보니 때를 맞추지 못한 영화들이 지나간다.
물론 이대로 보내진 않을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경로를 찾아내 다시 불러와 이야기하고자 한다. 뒷북이라 해도 상관없다. 다시 한번 주간지 영화기자의 업이란, 설사 인연의 때를 놓쳤다 해도 기어이 뒷덜미를 붙잡고 끌어와 마주 보는 데 있다. 머지않은 시간에 이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다루리라 다짐한다. 우선 아쉬운 대로 비평문들을 먼저 싣는다. 먼저 싣는 글이 비평문이라니, 민망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번주 실린 남다은 평론가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비평은 실은 다른 글을 더 받지 않더라도 충분할만큼 포만감이 드는 원고다. 꼭 일독하시길 권한다. 아니다. 김소미 기자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대한 칼럼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 영화는 이어달리기처럼 계속해서 다음 외침, 다음 호응을 불러올 영화다. 세르지오 생카를로스(베니치오 델 토로) 센세의 말처럼 “파도를 떠올”릴 수밖에 없고, 다음 글이 이어질 것이다.
10월의 극장가에도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온다. 극장에 머물러야 할 핑계를 제공해줄 영화가 너무 많다. 이우빈 기자의 <체인소 맨: 레제편> 비평은 전기톱의 순애를 말하며 심금을 울리는 이 비범한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뜻밖의 경로를 제공한다. 다행히 제때 도착한 <8번 출구>에 대한 차분한 해석에도 귀를 기울여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김소영 평론가의 <어쩔수가없다> 비평을 비롯해서, 박찬욱 감독과 김태리 배우의 마스터스 토크는 이 화제작에 관한 수다의 마침표로 더할 나위 없으리라 자신한다. 다소 늦었지만 후회는 없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에필로그로 영화인들에게 “당신이 믿는 영화의 힘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건넸다. 박찬욱 감독은 “어제도 영화 한편을 보고 깊은 충격과 질문을 받았어요. 어떤 영화는 저한테 자꾸 생각하게 하고 오랜 인상을 남깁니다”라고 답했다. 감독님, 감독님의 영화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답변도 잊히지 않는다 “영화의 힘은 다음 세대를 위한 미지의 길을 탐색하고, 그 길을 열어가는 데 있다고 믿는다.” <어쩔수가없다>를 보며 <그저 사고였을 뿐>이 생각나고, <그저 사고였을 뿐>을 봤더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 떠오른다. 영화가 어제를 되돌아보고 오늘을 발견하며 내일을 근심할 때, 때때로 스크린에서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영화들을 차례로 보며 새삼 내일로 이어지는 파도에 몸을 맡겨본다. 어쩌면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은 과대평가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위 장르적, 대중적이라고 하는 ‘즐거운’ 영화들은 여전히 매혹적인 스파크를 일으켜 주변을 밝게 비춘다. 비록 찰나일지라도, 눈이 멀지라도 그 불빛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떼고 싶지가 않다. 불이 꺼지고 난 뒤, 나도 뭔가 끄적이고 싶어졌다. 조용히 허무해져, 서럽게 고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