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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자잘한 행복의 총량
송경원 2025-10-10

아이가 자란다. 매일매일 그 성장의 궤적을 지켜보는 일은 마치 잊어버린 어린 시절의 소중한 순간들을 다시 마주하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를 재관람하는 기분이다. 이제 4살이 된 아이는 본인이 너무 기분이 좋을 때 예상치 못했던 말을 마치 감탄사처럼 내뱉는다. “엄마, 행복해? 주하가 웃으니까 좋아? 주하는 엄마가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내는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내가 안쓰러운지 되묻는다. “아빠는? 아빠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어지는 아이의 답에 모두 함께 쓰러진다. “아빠는… 조금만 행복해.” 늘 함께 있는 엄마와 자주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를 정확히 구분하는 말이 귀여우면서도 못내 미안해, 서운할 뻔한 마음을 감추고 답했다. “그래, 아빠는 조금만 행복할게. 대신 우리 더 자주 행복하자.”

맑은 물에 불순물이 들어왔을 때, 그걸 건져내고 지우려 애쓰면 물은 점점 더 흙탕물이 될 뿐이다. 힘들고 괴롭고 탁한 것들이 우리 마음을 흐릴 때 해야 할 일은 불순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깨끗한 물을 더 많이 붓는 것이다. 이건 비단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만이 아니다. 20세기 세계 경찰 노릇을 자처했던 미국이 노선을 바꾸면서, 바야흐로 세계화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펼쳐질 것 같다. 얼마 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역설한 자주국방은 이제 생존 전략 중 하나가 되었다. 서로 문을 걸어 잠근채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걸까. 점점 나빠지는 세상에 대한 명쾌한 해답 역시 얼마 전유엔총회 연설에서 대통령이 내놓았다. “우리에겐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나아지기 위해선 맑은 물을 더 많이, 더 자주 쏟아부어야 한다.

총량을 늘리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거대한 결과물에 집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횟수와 빈도를 늘리는 것이다. 하나로 뭉쳐진 결과물의 위대한 위용에 압도되어 강렬한 기억을 남기면 사람들은 그 길이 정답인 듯 갈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기왕이면 행복이 크기보다 빈도, 양보다 횟수였으면 좋겠다. 잊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행복도 좋지만 자잘한 행복이 부슬비처럼 내리는 나날이 이어지길 소망한다. 침체기에 빠진 극장가를 보며 문득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천만 영화의 위용도 훌륭하지만, 거대한 나무의 그늘이 사라진 빈자리에 햇살이 들이쳐 피어날 작은 성취들이 궁금하다.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이 발견하고 싶다.

21회 미쟝센단편영화제가 4년 만에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지만 적어도 늦지는 않았다고 확신한다. 때마침 우리에게 더 많은 종류의, 더 다양한 색깔의 영화들이 더 자주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 단편영화는 그저 짧은 영화가 아니다. 상영시간이 짧은 것, 제작비가 적은 것은 그저 하나의 여건에 불과하다. 오히려 단편이기에 가능한 호흡, 짧기에 가능한 상상력이 있다. 장편과는 다른 감각과 호흡,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야말로 2025년 가뭄에 시달리는 한국영화에 필요한 가능성의 텃밭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에겐 작지만 용기 있는 시도들이, 좀더 자주 필요하다. 오랜 준비를 마친 미쟝센단편영화제의 화단 안에 형형색색 다른 종류의 꽃들이 풍성하게 만개했다. 자잘해서 더 확실하게 빛나는 기쁨을 먹고, 한국영화가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