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한여름 호러의 맛
송경원 2025-08-29

영화에도 제철이 있다면 호러의 계절은 누가 뭐라 해도 여름이다. 왜 여름에 보는 호러가 더 제맛인 걸까. 공포를 맛에 비유하자면 매운맛과 닮았다. 매움은 맛이라기보다는 통증에 가깝다고 하는데, 공포영화를 보는 심경도 비슷하다. 다양한 종류의 불쾌감을 전제로 깔아야 얻을 수 있는 재미는 통증을 견뎌낸 뒤에야 오는 매운맛의 쾌감처럼 진입장벽이 만만치 않다. 어쩌면 여름이 호러영화의 계절로 자리 잡은 건 더울 때 뜨겁고 매운 음식을 먹는 것과 비슷한 심리가 아닐까 싶다. 공포에 흠뻑 젖은 뒤 등골이 오싹한 기분. 불쾌감의 허들을 통과한 자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

꽤 오랫동안 여름은 호러의 계절이었지만 최근 2, 3년 사이를 뒤돌아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연휴 영화, 방학 특수 등 영화 개봉의 전통적인 사이클이 무너지면서 한동안 호러도 상시 개봉에 가깝게 계절을 타지 않았다. 그런 호러가 다시 여름 시장을 공략하며 돌아왔다. 정확히는 1년 내내 다양한 방식의 호러들이 꾸준히 개봉하는 것에 더해 여름을 맞아 집중적으로 호러영화들이 개봉 중이다. 7월부터 <괴기열차> <구마수녀: 들러붙었구나> <강령: 귀신놀이> <검은 령> 등 한국호러가 잇달아 극장가를 찾았고, 시라이시 고지 감독의 일본 호러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는 이미 20만 관객의 선택을 받으며 화제를 모으는 중이다. 그리고 드디어 입소문이 무성하던 독창적 보디 호러 <투게더>와 전통의 호러 강자 <컨저링> 시리즈의 최신작 <컨저링: 마지막 의식>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큰 틀에서 ‘호러’라는 장르로 쉽게 묶지만 실은 공포만큼 문화권의 영향을 짙게 받는 섬세한 감정도 드물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어디에서 공포를 마주하는지는 정체성의 심연을 확인하는 본질적인 행위에 가깝다. ‘무섭다’는 결괏값은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에 이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매운맛을 피해 다니는 맵찔이였지만 호러영화만큼은 싫어도 다 챙겨볼 수밖에 없었다. 직업적 의무감으로 공포의 압박을 견디다 보면 신기하게 보이지 않던 것들,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귀신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공포를 즐기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희박하다 보니 얼마나 무서운지는 평가하기 힘들다. 대신 어떻게 공포에 이르는지, 그 과정이 더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역설적이지만 호러 마니아가 아니기에 허락된 망원경이라 해도 좋겠다.

돌이켜보면 미지의 존재나 알 수 없는 것이 두려웠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역시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난감할 뿐 무서운 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선뜻 대답하기 힘든 요즘, 부쩍 공포라는 게 참 어렵게 느껴진다. 그럴수록 그렇게 피해다녔던 공포영화를 자주 찾는다. 문득 <강령: 귀신놀이>에서 비밀을 알고 싶어 귀신을 불러냈던 소년, 소녀들의 심경이 이해가 갈 것 같다. 만약 무엇이든 답해주는 존재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할 수 있다면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세상이 나에게 감추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가요. 한여름 호러 삼매경 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 제법 잘 익은 빨간 맛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