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F1 레이스에 왜 돌아왔는지, 무엇을 위해 서킷을 달리는지 물을 때마다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는 중년 미남자의 선 굵은 미소를 장착한 채 내뱉는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흥행이 곧 존재 의미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무비가 이런 명제를 반복 강조하는 게 웃기지만 덕분에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F1 더 무비>는 누가 뭐라 해도 낭만에 대한 영화다. 자본주의의 최정점인 경주 F1에서 자본주의적인 공식(할리우드영화)에 입각해 빚어낸 낭만의 정수. 소니는 차와 함께 달릴 때 비로소 숨을 쉬는 사람이고, 그는 최고의 서킷부터 거친 사막까지 승리의 순간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한 팀에 정착하지 않고 항상 처음부터 새롭게 달릴 준비가 된 남자의 질주는 이미 낭만 그 자체다.
한국말 중에 낭만에 가장 가깝고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아마도 낭비가 아닐까 싶다. 낭만은 대체로 비효율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쓸모가 없을수록, 생산성이 떨어질수록, 어리석어 보일수록, 그 모자란 빈칸에 낭만이 차오른다. 바보 같다고 놀림당해도 좋으면 하는 것. 우리는 그 어리석음을 기꺼이 실행하는 무모함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실 속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타협해왔으니까. 팍팍한 삶의 윤활유가 되어줄 할리우드의 대리만족, 안전한 해피 엔딩이 필요한 이유다.
동시에 이런 낭만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역설적으로 성공이 필요하다. 예컨대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기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숫자다. 객관의 영역에서 나눌 수 있는 정확한 수치야말로 산업의 영역에 필요한 거의 유일한 언어다. 솔직히 지난 6월에 개봉한 <F1 더 무비>를 굳이 지금 이야기하는 것도 430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현실과 낭만. 상업적 성취와 예술적인 도전. 영화예술의 딜레마 또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내 맘대로 정한 낭만 치사량 기준, <분노의 질주> 시리즈 이후 가장 성공한 시리즈를 꼽는다면 <존 윅>을 빼놓을 수 없다. <존 윅> 시리즈의 스핀오프 <발레리나>의 주인공 이브에겐 선택에 관한 한 가지 명제가 주어진다. 운명에 선택을 당할 것인가, 나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 솔직히 스토리나 주제가 그리 중요한 영화는 아니지만 꽤 그럴싸한 테마를 세웠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브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결말은 대중 오락영화로 태어난 <발레리나>의 정해진 운명이란 점에서 더 재밌는 아이러니다.
<F1 더 무비>와 <발레리나>를 연달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때때로 우리는 양 갈래 길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믿지만 어쩌면 이건 그저 앞뒤로 배치된 순서의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0년 전 마이클 조던은 한 기자로부터 NBA 선수들의 몸값 상승에 대한 우려를 듣자 이렇게 답했다. “돈과 명예를 먼저 좇아선 안됩니다. 그건 따라 오는 거예요. 선수는 경기 자체를 사랑해야 해요.”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이걸 현실에서 증명한 이가 내뱉으니 무게가 남다르다. 숫자는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수 있지만 목적지가 되는 순간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다. 낭만을 잘 포장해 배달해주는 매끈한 영화들도 좋지만 아직은 거칠고 투박하게 낭만을 좇는 영화들을 좀더 만나고 싶다. 새삼 영화잡지의 낭만이 무엇일지, 리스트를 한번 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