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양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되도록 쌍방적인 소통을 하기 위해 애쓰는 편이다. 우리 저널리즘의 근본 문제 중의 하나가 일방성에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과거에는 매체 환경의 특성으로 인해 상당 부분 일방성이 불가피했고, 그만큼의 권위와 그에 따르는 전문성 및 책임의식이 어느 정도 갖춰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방적인 저널리즘은 불가능해졌다. 그만큼 권위도 약해졌다. 그렇다면 내려놓아야 할 권위의식, 유지해야 할 권위 및 책임성, 그리고 다시 창출해야 할 응답성 사이의 새로운 균형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양방향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선하고 좋은 건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소수 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소수는 다수와 일대일로 호응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다수의 피드백을 소수가 갈무리하여 정돈하는 일, 그리고 그런 정돈에 바탕을 두어 다시 말을 건네는 일이 필수적이다. 갈무리 과정에서 특정 의견이 배제되는 건 불가피하다. 아니, 필수적이다. 모든 것에 응답할 수도 없지만 모든 것을 고려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더 그렇다. 게다가 다수의 응답 가운데에는 자신만의 일방성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다행히 우리 채널은 댓글을 통한 소통을 강조하기에 이런 사례가 매우 드문 편이다). 소수가 꺼낸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판단을 내리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자신들이 본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여 확신에 찬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심지어 보았다는 그 부분조차 스스로의 편견과 선입견에 얽매여 왜곡시킨 결과물이다. 이런 일방성에 응답하는 것은 그리 선한 일도 아니고 지속 가능한 의미도 없다. 보고 들을 것이 많아졌고, 말할 기회와 수단도 늘었으니, 마땅히 ‘대화적 커뮤니케이션’을 증대해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딱히 그렇지가 않다. 수많은 것들 가운데 내 눈과 귀를 내어줄 소수의 대상을 추리기 위해 우리는 (원칙적으로 불가피하지만 실천적으론 다분히 나쁜 쪽으로) 냉정해지고 모질어진다. 그렇게 추려진 소수들이 어떤 이유로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엔 그냥 버리면 된다. 어차피 내 한정된 눈과 귀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수많은 대안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상은 희소하지도 따라서 소중하지도 않으며, 귀한 것이라고는 오직 나의 소중한 감정과 시간 그리고 돈뿐이다. 미디어가 늘고 연결이 증대될수록 속 깊은 대화와 진정한 관계에 목말라하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역설적이다. 너무 많은 매체와 너무 많은 콘텐츠가 문제일 수는 있으나 그걸 역전시킬 방법은 없다. 그러다 보니 믿을 만한 중개자를 다시 찾게 되고, 지금 선택되고 있는 매체나 사람 그리고 내용물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속성을 띤다. 기술의 효율성과 규모의 거대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우리는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그 속에서 인간적 신뢰와 수공업적 공동체성으로 대응하는 주체를 종종 ‘스피커’라고 지칭한다. 무엇을 선택하거나 누구에게 의존하건, 이 역설을 깨는 건 결국 스스로여야 한다. 나만 소중한 게 아니라 그들 역시 소중하다고 여기며 ‘대화’하려는 우리가 늘지 않고서는, 인간은 계속 더 강퍅하고 허무한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